최근 코로나 환자가 다시 급증했다는 기사를 보다가 4년 전 한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새삼 참 오랜 전 일인 듯 한 것을 보니... 그토록 낯설고 두려웠던 감정도 결국은 시간에 실려 멀어져 가는구나 싶다.
우리 가족은 중국과 인연이 깊다. 나는 중국어를 전공해 관련 일을 해 왔고, 남편은 직장 생활의 절반을 중국 주재원으로 지냈다. 언어소통에 큰 문제만 없다면 중국에서의 주재원 생활은 꽤 여유롭고 즐거운 경험이다. 명목상 외국이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본국을 오갈 수 있는 거리여서 편했고, 같은 동양인이라는 동질감과 타국의 이방인이라는 이질감이 적당히 혼재하는 삶이 안정적이면서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전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코로나 시국의 중국 생활은 그야말로 이례적인 경험의 연속이었다. 일단 중국 공항에 입성하는 과정부터가 난항이었다. 나의 과대 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바이러스를 몰고 오는 집단으로 취급받는 듯한 삭막한 공기가 여전히 기억에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2020년 초 남편은 중국 칭다오 주재원으로 발령되었다. 상하이에서 8년간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3년 만에 다른 지역으로 재발령된 것이었다. 남편이 먼저 들어가 집과 학교를 알아보고, 딸아이와 나는 한국 생활을 정리해 6개월 후에 따라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중국에 들어가고 얼마 후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온 세상을 덮쳤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날 듯 말 듯 장기화하면서 타국의 국경을 넘나드는 일은 전에 없이 번거롭고 까다로워졌다. 공항을 이용할 때는 핵산 검사 음성확인서가 필요했고, 양성 환자와 접촉자들은 착륙하자마자 격리되었다. 그해 10월 칭다오로 출발할 무렵까지도 중국으로 출국하려면 음성확인서 필수 지참에 현지 도착 후 무조건 2주간 지정 장소에서 격리해야 했다. 2주 동안 몇 차례의 핵산 검사를 추가로 해서 최종 이상 없음이 확인되어야 격리 해제되어 제 갈 길을 갈 수 있었다.
출국 준비를 하는 동안 현지의 삼엄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방송 화면으로 계속 접했던지라 비행기에 오르내리는 내내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였다. 여행의 시작을 실감하며 몽글몽글 설렘이 차오르던 장소가 이토록 꺼림칙한 장소로 둔갑하다니. 무거운 정적과 함께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한 칭다오 공항에서는 착륙했어도 한참 대기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앞 좌석부터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고, 공항 입국 게이트 곳곳에 배치된 방역 요원들의 지시를 들으며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였다.
여담이지만 코로나 당시 이 방역 요원들을 ‘大白(따바이, ’커다란 흰색‘이라는 뜻)’라고 불렀는데, 따바이는 디즈니 영화 <빅히어로>에 나오는 주인공의 소울메이트 로봇 ‘베이맥스’의 중국 이름이기도 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겹겹의 흰 방호복으로 칭칭 둘러싸고 고글에 마스크까지 낀 모습이 외형상 ‘베이맥스’의 모습을 연상한다고 해서 붙여진 듯하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모습은 ‘베이맥스’의 푸근하고 친근한 이미지와는 사뭇 달라서 무섭고 위압적이기만 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다음 코스는 공항에서의 PCR 검사였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막무가내로 쑤시더라, 너무 아파서 피가 나더라... 비행기에 타기 전 읽었던 입국 후기들에서 하나 같이 치를 떨었던 바로 그 단계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 장소로 다가가는데 악을 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딸아이에게 좀 아플 수도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시켰지만, 정작 나도 겁나긴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고, 방심한 사이 인정사정없이 코안 쪽을 훑으며 푹 쑤셔오는 불쾌한 통증과 이물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걸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해야 한다니.
잠시 후 격리 장소로 이동하기 전 짐을 찾으러 갔는데, 같은 비행기에서 내려진 것으로 보이는 수화물들이 하찮은 짐짝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락스 물을 끼얹었는지 소독약 냄새에 절인 채로 말이다. 시간을 ‘빨리 감기’해서 이 고된 과정을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혼을 쏙 빼게 하던 입국 절차가 마무리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문득 입국 전 휴대폰에 내려받은 중국 건강 코드 상태가 궁금해졌다. 조심스레 열자마자 경고하듯 선명한 빨간색이 화면에 튀어나왔다. 이곳의 모든 환경은 ‘그러게 굳이 이 험한 길을 왜 왔냐’며 쌀쌀맞게 밀어내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 고생길을 향해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복불복이라던 격리 호텔이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여서 2주간 갇혀 있어도 나름 휴양지에 온 기분을 내며 버틸 만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행 중 확진자가 한 명이라도 나오면 단체로 병원에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긴장감이 기본값으로 깔려 있긴 했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면 두 시간이면 족히 닿을 곳이었지만 우리는 국경 언저리에서 그렇게 2주를 헤매다 겨우 칭다오에 입성했다. 남편을 지척에 두고 참 오래 돌고 돌아서 상봉한 세 가족이 부둥켜안던 그 순간... 울컥 터져 나왔던 씁쓸하고 묘한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