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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Jul 13. 2024

덜어냄을 거쳐 단단함으로

  

소설 번역 교정본을 받아 작업 중이다. 1차로 출판사에서 교정을 봐서 보내주셨고, 교정 제안 내용과 확인이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다시 원문과 대조하며 내 의견을 적고 있다. 퇴고할 때마다 느끼지만 글을 조탁하는 과정은 덜어냄과 가다듬음의 연속이다. 고치고 고쳐도 또 다듬을 게 보이고, 어느 정도 다듬어졌나 싶다가도 더 나은 표현이 있지는 않을까 자꾸 미련이 남는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적당히 절충한 어휘가 있기라도 하면 최종 '보내기'를 누르기 직전까지 아른거린다.   



번역은 원문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반 글쓰기와 출발점이 다르다. 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글을 내가 다른 언어로 가공해 다시 쓰는 것이다. 그러니 원문에 드러난 문장의 구조와 사이 사이 배치된 어휘들을 다분히 의식할 수 밖에 없다. 번역가마다 작업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초벌 번역 단계에서는 원문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는 선에서 가감없이 도착어 활자로 툭툭 내뱉어 놓는다. 우선은 원문에 발을 걸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다. 


물론 정제하지 않고 쏟아내기 때문에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이 그득하게 달라붙어 있고, 엉성하게 끼워 맞춰 놓아서 문장이 그야말로 ‘울퉁불퉁’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불찰로 놓치는 내용이 없어야 하므로 일단 원문의 언어 재료들을 늘어놓은 다음 한국어만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구조를 재배치하고 잘 읽힐 수 있도록 ‘때빼고 광내는’ 퇴고 작업에 돌입한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초벌 수준으로 계속 옮겨놓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와 고치려면 시간차가 벌어져 원문의 느낌을 온전히 상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단락 단위로 이 과정을 반복하고 마지막에 또 한번 전체적으로 윤문을 하는 편이다.      


윤문은 결국 새로운 무언가를 보태기보다는 언어의 본질적 차이로 인해 옮기는 과정에서 불어난 무게를 덜어내고, 모호하게 뭉개진 심상을 선명하게 펼쳐내는 일이다.    

장황하게 늘어지는 곳은 적당히 떼어내어 조여주고, 

계속된 반복으로 무겁게 처지는 곳은 가지치기를 하며 

듬성듬성 비약이 심한 곳은 헐거움을 채워주되, 

아귀가 맞지않아 삐걱대는 곳은 잘 맞물리게 맞춰준다. 

이처럼 원문의 본질에 몰두하며 덜어내는 과정을 거치면 문장은 더욱 정갈하고 날렵하며 단단해진다.     



 

덜어냄을 거쳐 글이 단단해지듯이 

우리의 삶도 불필요한 짐을 내려놓음으로써 좀더 탄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나는 삶에서도 간결하고 담백한 일상을 실천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원래 인테리어나 패션 취향이 ‘미니멀리스트’ 쪽에 가깝긴 하다. 알록달록 가득 채우기보다는 색감을 최소화한 깔끔 스타일을 선호한다. 그래도 살다보면 매일 버리며 살지 않는 이상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이 누적되기 마련이다. 글을 쓰고 나면 퇴고의 과정을 거치듯이, 내 삶이 진행되는 공간도 한번씩 점검하며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주기적으로 무게를 덜어내고 밀도를 줄여 여백을 내야 한다.      


결혼하고 해외 이사를 몇 번 거치면서 짐을 버리고 비워내는 게 조금은 익숙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중간 중간 그런 ‘덜어냄’의 순간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분류하며 몇 날 며칠 짐들과 사투를 벌이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소유에 대한 집착도 함께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구석 구석에서 끄집어낸 옷가지들이 무덤을 이루고, 책꽂이에 빼곡하게 끼어있던 책들이 더미로 쌓여가며, 

기분을 내느라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소비를 한 물건이나 내 의지가 아닌 누군가에게 혹은 어딘가에서 받아온 물건들은 결국 ‘예쁜 쓰레기’ 신세가 되어 내쳐진다. 


눈앞에 널린 거대한 집착의 흔적 앞에서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지갑을 여는 찰나의 감정을 왜 꾹 눌러내지 못했을까... 효용을 다한 것들, 셀렘이 사라진 것들을 왜 이렇게 아득바득 끌어안고 지냈을까... 각성하며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단순하지만 단단한 삶, 여백 있고 여운 있는 삶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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