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을 둘러보다가 한참동안 시선을 고정했던 글귀다. 내가 추구하는 노선, 딱 그 자체다. 단순하지만 허술하지 않고, 단단하지만 유연하며, 단아하지만 당당한 삶.
이러한 취향은 내가 머무는 공간에도, 사용하는 물건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차고 넘치는 것보다 여백을 남기는 것이 더 좋다. 특히 12월이 되면 한 해를 지나오며 삶의 공간에 덧붙은 군더더기들을 떨쳐내고 싶어진다. 주기적으로 공간의 무게를 덜어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한 건 결혼 후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네 차례의 해외 이사를 거치며 생긴 습관이다. 이사 때마다 벌인 버거운 짐들과의 ‘사투’를 떠올리면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물욕도 이내 수그러진다.
임신 6개월차로 들어서던 2009년 초여름 무렵이었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중국 주재원으로 발령되면서 홀연히 상하이로 먼저 떠났다. 한국에서 살던 집을 정리하고 이사짐을 보내는 건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현지에서 임대한 집에 웬만한 가구는 다 있다고 해서 쓰던 가구도 다 처분해야 했다. 신혼 때 장만해 2년도 채 쓰지 않은 것들이라 멀쩡했지만 싸 들고 갈 수 없는 상황. 그 당시에는 당근마켓도 없었고, 있다 한들 혼자 그 많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올리고 흥정하고 거래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필요한 가족들에게 주려고 해도 시댁은 강원도, 친정은 제주도… 운반 비용이 더 들 지경이었다. 혼자 끙끙거리다 결국 중고 가구 업체 인력을 불렀다. 그들이 소파며, 테이블이며, 식탁까지 싹 가져가면서 내놓은 매입 가격은 너무 터무니없었다. 침대도 처분할 거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천연덕스럽게 한 마디 했다.
“침대는 몇 년을 썼든 어차피 잘 팔리지도 않아. 매입까지는 아니고 가져가는 김에 치워줄 수는 있어.”
지금 그냥 가져가겠다는 건가? 본전 생각에 마음이 쓰라렸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치워줄 사람도 없고 시간도 없는 걸. 그날 난 남편과 정성스럽게 골랐을 신혼 가구들을 그렇게 허무하게 내치며 정을 떼야 했다. 그리고 6년이 흘러 2015년 다시 한국 행. 귀국하면서 새로 장만한 집은 구석구석 새 가구와 가전으로 순식간에 채워졌다. 설마 다시 해외로 나갈 일은 없겠지. 이제 좀 정착하나 싶던 2020년, 또 중국으로 발령이 났다는 남편의 통보. 정리와 이사는 역시나 오롯이 내 몫으로 남았다. 이번에는 침대 두 개, 소파, 책상, 책꽂이, 식탁, 냉장고까지 내 가구와 가전은 어떻게든 싸 들고 가자는 마음으로 이삿짐 컨테이너에 다 욱여넣었다.
2023년 1월, 우리는 3년 남짓 이어진 두 번째 주재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또 시작이었다. 이삿짐과의 씨름이. 한국집이 중국에서 살던 집보다 좁아서 그 사이 한껏 불어난 짐들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숙제였다. 귀국 한달 전부터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분류하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거슬린 것은 거대한 로잉 머신과 전자 드럼이었다. 타국 생활에 힘들 아내와 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챙겨주고 싶었던 것인지, 남편이 야심 차게 그것도 친히 주문해 들여온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당초 취지가 무색하게 이미 오래 방치되어 애물단지나 다름없었고, 저건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뿐 만이 아니다. 구석 구석에서 끄집어낸 옷가지들이 무덤을 이루고, 책꽂이에 빼곡하게 끼어 있던 책들이 더미로 쌓여갔으며, 언제, 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물건들이 쏟아졌다. 기분을 내느라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소비한 것들은 결국 ‘예쁜 쓰레기’ 신세가 되어 내쳐졌다. 몇 날 며칠 눈앞에 널린 물욕의 흔적들을 적나라하게 마주하며 자책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지갑을 여는 찰나의 감정을 왜 꾹 눌러내지 못했을까. 기억에서 사라진 물건, 효용을 다한 물건, 아직 쓸만해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물건, 더 이상 설레지 않는 물건 등 수많은 것들이 내 손으로 폐기 처분되는 과정을 거칠 때마다 다짐한다. 최대한 “단순하게 살아보자”고.
때로는 의지가 흔들리기도 하지만 내 공간만큼은 물건을 최소한으로 들이되 주기적으로 간헐적 비움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정리는 갖다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위해 남겨둘 것을 고민하는 것”이라던 한 수납 전문가의 말을 자꾸 상기한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만 소유하자고.
더 늦기 전에 5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를 꺼낸다. 올해도 여기저기 누적된 군더더기들을 떼어내고 여백을 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