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축 처질 때마다 돌려보는 동영상 모음 폴더가 있다. 음악만 나오면 흔들어대던 어린 시절 딸아이의 춤 영상들이다. 내게는 그 어떤 숏폼보다 강력한 웃음버튼이다. 흥이 난다 싶으면 어디서든 리듬을 타며 들썩이던 아이. 꼬꼬마의 나름 진지한 몸짓과 손짓, 눈짓이 내 눈에는 자지러지게 귀여웠다. 걸그룹 영상을 몇 번 유심히 보고 포인트 안무들을 그럴 듯하게 따라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제법 괜찮은 춤선에 감탄하면서도 흥을 뿜어내는 저 유전자는 어디서 왔을까 아직도 의아하다. 모태 몸치인 내가 출처일리는 없는데. 어쨌거나 목석 같이 뻣뻣한 엄마를 닮지 않아 다행이다.
사춘기가 된 딸아이는 요즘도 공부 스트레스를 춤으로 푼다. 가끔 거실에서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고 한바탕 흔들어 젖힌다. 간혹 같이 하자는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나도 합류해 보지만 뒤에서 허우적대다가 이내 관객 모드로 되돌아 간다.
난 선천적으로 춤과는 거리가 멀다. 춤은 커녕 몸을 쓰는 모든 일에 둔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 답답한 심정을 너무 잘 안다. 운동 센스가 정말 빈약하다 못해 바닥에 가까워서 요가, 필라테스, 테니스, 골프… 이런 저런 운동을 도전해 보지만 꾸준히 이어지지 못했다. 호기로운 초심과 달리 초보 단계에서 헤매다가 흐지부지 그만 두기를 여러 번. 춤도 그 중 하나다. 아마 최단 시간 내에 포기 선언을 했던 운동일 거다.
아파트 커뮤니티센터에서 운영하는 방송댄스반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한 수업은 첫날부터 녹록치 않았다. 몸매를 드러내는 밀착된 운동복 차림의 기존 ‘회원님’들은 선두 대열에 서서 노래가 나올 때마다 익숙한 듯 일사불란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반팔 티셔츠에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를 대충 걸친 채 맨 뒷줄 구석 자리에 소심하게 서 있던 나. 앞사람들의 뒤태를 보며 흉내라도 내보려고 안간 힘을 써보지만 경직된 ‘몸뚱이’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박자는 엇나가거나 놓치기 일쑤였고, 사지는 쭈뼛쭈뼛 따로 놀았다. 내 몸인데 왜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못하니.
같은 공간 확연히 다른 온도…… 누군가는 엉덩이 춤과 현란한 몸놀림으로 그 순간을 한껏 즐기고 있었지만, 나는 ‘엉거주춤’과 어설픈 ‘몸부림’으로 줄곧 애쓰고 있었다. 애잔하게 겉도는 거울 속 내 모습을 참아내며 꾸역꾸역 몇 번을 나가다가 결국은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현실의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재능이라 춤 실력이 탁월한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한동안 딸아이와 ‘스우파(스트릿우먼파이터)’라는 TV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댄스 크루들의 배틀 프로그램이었는데, 화면 속 댄서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당당하고 절도 있는 몸짓에는 춤을 향한 진심과 온전히 즐기는 여유가 흥건했다. 저들처럼 춤을 잘 추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젊은 시절 그 흔한 클럽 문턱에도 못 가본 일인이라 그 세계가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한결 빛나고 동적이며 다채롭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음주가무가 쏙 빠진 나의 일상은 늘 정적이다. 새벽 시간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음악들처럼 나직하고 잔잔하다. 감정의 배출도 몸보다는 글로 하는 편이다. 가끔은 감정을 몸짓으로 표출해 내는 삶, 흥과 한을 춤으로 승화하는 경지에 이른 삶이 어떤 조도와 텐션을 지녔을지 궁금하다.
방송댄스반을 좀더 참고 열심히 다녀볼 걸 그랬나. 이제 와서 후회가 밀려든다. 그때는 자꾸 동작이 꼬이고 뒤처진다는 민망함에 스스로에게 여지를 줄 새도 없이 ‘자격 미달’ 딱지를 냉큼 붙여버렸다. ‘몸치면 어때, 그냥 즐기자’라는 마인드를 장착할 만큼의 넉살이 없었다.
오늘도 흥부자 딸아이는 싸이의 음악을 틀어놓고 온몸으로 흥을 표현하고 있다. 마음 따라 날렵하게 움직이는 아이의 유연한 몸이 그저 부럽다. 그리고 즐거워 보인다.
올해는 나도 구겨 넣었던 의지를 다시 한번 펼쳐나 볼까? 생각난 김에 유튜브 창을 열어 슬쩍 검색해 본다. “왕초보 다이어트 댄스”. 어디 가서 내보일 것도 아닌데 나홀로라도 즐기면 그만 아닌가. 단지 타고나지 못한 리듬감이 한스러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