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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일 Apr 28. 2021

내 출사표는 자퇴서

그러나 세상엔 걸출한 인재들이 너무 많고


 다니던 학교에 자퇴서를 던져 본 적이 있는가.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 해볼 만한 경험이다.


 물론 나는 반수에 성공했기에 했던 짓이었지만, 하여튼 그건 굉장히 짜릿한 일이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기차로 왕복 3시간 걸리던 학교를 아빠 차를 타고 갈 때의 그 기분이란. 영문과 조교실에서 자퇴서에 사인할 때의 그 기분이란! 너무 좋아서 조교실 의자 다리에 폰을 떨구는 바람에 아이폰 액정이 다 깨져도 나는 즐거웠다. 앞으로 겪게 될 험난한 미래를 상상 못 한 건 아니지만, 이제 나랑 상관없는 공부를 하는 듯한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학교가 더 가까워진 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미술 입시의 특성상 같은 학원 출신들이 많이 합격했다. 덕분에 나는 이미 사귄 친구들과(물론 다 동생들이었다.) 학교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 학원뿐만 아니라 다른 학원 친구들도 그랬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웠던 건 이미 유명한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명 플랫폼에서 웹툰을 연재하는 작가 선배, SNS에서 그림을 올리며 유명한 선배, 실기 대회에서 상을 휩쓸어 잡지에 이름이 자주 올라 유명한 동기. 어떤 친구들은 얼굴은 본 적 없어도 SNS 그림을 통해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서로를 알고 있다니. 영문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세상은 넓고 사람 사는 모양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나랑 동갑인 데다 나처럼 다른 걸 전공하다 온 애도 있었고, 삼수생인 친구도 있었고,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학교 지박령인 선배도 있었고, 외국인인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는 학생회 선배도 있었다. 무엇보다 만화·애니메이션과 이지 않은가. 나를 포함해 오타쿠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게 참 편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결이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불편하지가 않았다. 영문과는 인원도 많고 같은 영문과 내에서도 너무 다른 느낌의 사람들이 모여 북적북적했었다. 이곳도 다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뭔가 한 번 깔때기로 걸러진 느낌(?)이 들었다. 특이한 친구도 많고. 재밌는 친구도 많고. 머리 색깔도 휘황찬란하고. 다들 만화 캐릭터 같아서 재밌었다. 성격 좋은 친구들도 많아서 정말 감사했다.


 1학기 수업 중에는 주제를 놓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다. 학원에서 내내 시험만 봤던 켄트지에 좋아하는 패션 화보 컨셉을 따와서 꽉 차게 그려 넣었다. 내가 좋아하는 다양한 색들로. 여전히 그림 그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나는 나만의 그림을 그려 나가면 되겠지. 그렇게 다짐하며 새로운 학교생활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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