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딩스쿨은 치테제라고 하는 마을과 길리메라고 하는 곳에 있었다. 치테제 보딩스쿨에 들려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길리메에선 교장선생님을 만나 늦게까지 설득하고 부탁했다. 감사하게도 두 학교 모두 아이들을 받아주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치테제 보딩스쿨은 1년간 아이들을 맡아 줄 수 있다고 했으며 길리메 보딩스쿨은 3년간 맡아줄 수 있다고 했다. 공짜는 아니었다. 치테제는 아이들을 맡는 대신 낡은 도서관을 리모델링해달라고 했고 길리메는 도서관 자체가 없기에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전부터 SNS를 통해 내 활동을 지켜봤던 몇몇 분들이 조지의 집을 만들어 주는 데 함께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주셨었다. 나는 집 대신 학교와 마을에 도서관을 설립해주고 아이들을 보딩스쿨에 들여보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메시지를 주신 분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모두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도서관을 짓기에 이 분들만의 도움으로는 부족했고, 그만큼의 부담을 드리기도 죄송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고, 다시 남미에서 학교를 하고 있는 형(이하 꽃거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형은 간단한 솔루션을 줬다. 우선 글을 쓰고, SNS에 올려라. 그럼 알아서 해결될 거다,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엔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이런 일에 후원금을 보낼까 싶었다. 형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까짓꺼 안되면 본인이 도와주겠다며 우선 써보라고 했다. 나는 형의 말을 믿고 글을 썼다.
치테제 보딩스쿨과 길리메 보딩스쿨에서 요구한 조건과, 아이들 중 누구누구가 학교에 갈 수 있는지, 몇 년 동안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 학교는 어떤 곳인지, 그러면 얼마가 필요한지 등을 써서 글을 올렸다. 후원자 모집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누군가 땀 흘려 힘들게 번 돈을 받는다는 것, 자신의 이익을 생각함도 아니요, 순수하게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이들에게 받는 돈이 귀하다는 걸 알기에 요청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형의 말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용기를 내서 후원 글을 올렸다. 올리자마자 핸드폰을 무음에 둔 채 침대와 멀리 떨어트려 놓고 잠에 들기 위해 애썼다.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부담 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이런 글을 직접 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 마음이 힘들었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느라 꾸역꾸역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결국 새벽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누가 후원은 해줬을까. 댓글이 달려 있을까. 얼마가 들어왔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고 쿵쾅대는 마음으로 SNS를 열었다. 응원한다는 댓글이 많이 달려 있었다. 지인들 몇 명과 SNS상에서만 아는 분들이 65만 원을 보내주셨다. 아니 진짜 후원을 해주셨네. 어떻게 돈을 이렇게 보내줄 수가 있는 거지? 따듯한 마음들에 감동해 감사하다는 댓글을 남기고 혼자 뭉클해했다. 건축에 필요한 돈은 400만 원이었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이 정도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째 날에 다시 확인을 하니 250만 원이 채워져 있었다. 감사가 끝없이 나왔다.
다음 날부터 바삐 움직였다. 나 혼자만의 생각과 의견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기에 현지인 친구들 여럿과 함께 보딩스쿨을 찾았다. 계약 전에 혹여나 문제가 될 만한 요소들을 찾고, 다시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둘러본 후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친구들은 도서관을 짓는 비용이면 말라위에선 엄청 큰돈이라며 3년보다 더 길게 케어해주셔야 한다고 열성을 다해 말했다. 이곳도 후원으로 운영되는 곳이고, 다른 아이들이 내는 기숙비용 또한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조사한 친구들은 당당히 설득했다. 교장선생님은 긴 대화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케어를 해주겠다는 계약을 해주셨다(말라위는 중학교가 없다). 현지 엔지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나 대신 사인을 했고 내가 떠나고 난 후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나는 진료를 일찍 마치는 날과 주말에 학교를 갔다. 길리메 마을까지는 빠르면 2시간, 느리면 5시간까지도 걸렸다. 자차가 없던 나는 이 나라의 미니버스를 타고 움직였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5명 정원인 버스에서 22명이 타기도 하고 자리가 없을 땐 손님이 내 무릎에 앉기도 했다. 찜통 속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밖으로 나올 때면 우르르 모두 내렸다가 우르르 다시 몰려 탔다. 5분마다 한 번씩 누가 내리고, 탈 때마다 우르르거렸다. 깊은 인내가 필요했고 평정심이 필요했다. 택시를 타면 3만 원 정도가 나왔는데 한번 귀찮음을 감수하면 돈을 아낄 수 있었다. 나 편하자고 매번 택시에 돈을 버릴 순 없었다. 값비싼 돈이었다.
지인에게 관리감독을 소개받았다. 말라위에선 정직한 사람이면 반은 먹고 들어갔다. 그 사람을 통해 필요한 건축 자재들과 인부들을 고용했다. 사람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감사히 받은 돈을 쓸데없는 곳에 나가지 않게 하려면 사람을 잘 만나야 했고, 자재들을 바가지 쓰지 않고 잘 사야 했다. 결국 내가 이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했다. 밤낮 시간이 나는 대로 공부하고 현장으로 갔다. 잘 모르는 풋내기가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일하시는 분들에겐 조금 불편할 수 있었겠지만 감사하게도 좋은 분들을 만나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건축 현장에 자주 오다 보니 인부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과 자주 대화했고 그들의 좋지 않은 치아를 발견했다. 그들은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서 진료를 받고 싶어 했기에 나는 같이 근무하는 병원 의사들을 마을로 데려갔다. 교장선생님의 요청하에 인부들 외에도 기숙하고 있는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진료를 봐주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나중에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진료를 봐주었고 빛이 없어 핸드폰 불빛으로 진료를 봤다.
한 켠에는 도서관 건축을 하고, 한 켠에는 진료를 보고있는 모습이 내가 학생 때 꿈꾸던 것과 비슷했다. 이렇게 한 달, 두 달 마을에 머물며 진료를 해준다면 집도 지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가르쳐 줄 수 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인생을 조금 더 다양한 경험과 다채로운 색깔들로 채워 넣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하며 사탕수수와 옥수수, 시마를 가져와 선물해주었다. 돈을 번 것도 아니고, 화려한 일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엔 벅찬 무언가가 뜨겁게 뭉클거렸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무엇이든 어렵게 생각지 말고 한 발자국씩 내딛는 것, 그게 중요했다. 결과의 성패는 알 수 없다.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아마 처음엔 실패할 확률이 크겠지만 그 실패가 하나하나 쌓이다 보면 성공이라 부르는 곳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성공의 기준은 너도 나도 다르기에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 누군가는 100억 부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고 누군가는 유명해지는 것이 성공이다. 내가 느끼는 성공은 물질적인 것과 보여지는 것에 기반하지 않는다. 여행을 통해 느낀 수많은 경험들이 내 성공의 정의를 조금은 다르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보여지는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소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공허하다. 내면이 단단하지 않다면 이런 것들은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쉽사리 무너진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끊임없이 스스로 물으며 성장하고 싶다.
도서관이 지어질 동안 아이들 중 누구를 학교로 보낼지 정하기 위해 이들의 가족을 만나러 다녔다. 몇몇은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몇몇은 어머니나 이모, 할머니가 케어를 해주고 계셨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선 가족 동의서가 필요했기에 그분들을 만나러 다른 마을을 찾아다녔다. 마을로 들어갈 때면 외국인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 모두 달려 나와 나를 따라다녔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르듯 나를 본 아이들은 집에서 뛰쳐나와 따르기 시작했다. 대부분 외국인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동양인인 내가 신기했던지 종내에는 골목골목을 가득 채워 소리를 지르며 따라다녔다.
조금 걷기만 해도 땀이 콸콸 쏟아지는 날씨였다. 상점에 들어가 시원한 얼음물을 사 먹으려 할 때면 뜨거운 물을 내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에 넣어놓지 못했다고. 핸드폰 하나면 만사 오케이인 세상에서 누군가를 찾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세 번이나 찾아갔지만 허탕을 쳤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 찾아간 날은 불금이었다. 누군가는 신나는 불금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나는 뭘 하고 있나. 뭘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종종 찾아들었다. 이렇게 세 번, 네 번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소위 '현타'가 온다. 이곳에서 현타가 올 때는 별 다른 방법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일을 하면 된다.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그냥 하는 것이다. 저스트 두 잇. 그렇게 4번째로 마을을 다시 찾았다.
여전히 아이들의 가족은 오지 않았다. 오늘은 끝장을 봐야겠다 싶은 마음에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두 시간을 더 기다렸다. 깜깜한 밤이 펼쳐졌지만 현지인 친구 한 명과 같이 살던 미국인 친구가 함께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한 아이(루카스)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아이와 어디서 만났고, 어떻게 관계를 쌓아왔고, 어떤 곳으로 아이를 데려가 교육시키고 싶은지에 대해 설명을 드렸다. 어머니는 혼자 가는 것이 아닌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라면 좋을 것 같다며 감사를 표했다. 다른 아이(지악)의 이모는 아이와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의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한 결과 조지, 렉손, 파이손, 루카스 네 명을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보딩스쿨이 남자 학교였기 때문에 애니퍼나 조소 같은 아이들은 보낼 수 없었다.
아이들 네 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전부 새로 사주어야 했다. 새 옷가지와 가방, 필기구, 매트리스, 이불, 신발 등 현지 마켓을 아이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원하는 것을 사줬다. 새 옷을 입고 자랑하듯 사진을 찍는 아이들의 입가에 웃음이 넘쳤다. 새 물건을 가지고 보딩스쿨로 이동을 했다. 다른 마을로의 이동 자체가 처음인 아이들의 표정에는 적당한 긴장과 설렘이 서려있었다.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잠시 걱정을 했지만 학교 아이들과 축구를 같이 하며 곧 잘 어울렸다.
도서관 건축비용은 9일 만에 582만 원이 채워졌다. 금액이 초과됐음에도 더 보내주신다는 분들이 많아 새로 포스팅을 올렸다. 그만 보내시라고 ^^;; 초과된 금액은 후원자분들과 상의를 했고 축구골대와 축구공, 유니폼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추가로 도서관에 들어갈 책들 까지도.
학교와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축구골대는 긴 나무 막대기 두 개를 세워 놓은 것이 전부였다. 축구공은 천 때기를 뭉쳐 만든 것이 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도서관 증축이 거의 완료될 시점부터 골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축구골대를 따로 팔지 않았기 때문에 긴 파이프 16개를 사서 직접 만들어야 했다. 파이프를 트럭으로 옮겨왔고 용접공을 불러 학교 운동장에서 용접을 진행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말라위 정부에서 전기를 아껴 써야 한다는 명목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을 관리했는데, 당시에는 새벽 4-5시 한 시간을 줬다. 제일 쓸 데 없는 시간에 전기를 주고 나머지 시간엔 정전이 된 상태로 살으라는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정책이었다. 웃긴 건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말 같지도 않은 이 정책을 순수히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결국 며칠간 용접을 하지 못하다가 주말 오후에 전기를 조금 더 주는 시간에 빠르게 진행해 2주에 걸쳐 축구 골대를 만들었다.
몰려든 학교 아이들과 마을 청년들은 새 축구공 하나를 보여주기만 해도 너-무-나 행복해하며 환호했다. 기존에 가지고 놀던 축구공과는 비교가 안 되긴 했어도 이게 이렇게 행복해할 일인가? 더 누리고 가지지 못해 안달 나하는 우리 모습과 참 비교가 됐다. 새로 만들어진 유니폼을 다 같이 입고, 새로운 축구공으로 새로운 골대에 골을 넣는 모습, 감히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이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간 힘들었던 시간이 다 보상됐다. 그저 이들의 행복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느낌, 아- 이 맛에 봉사를 하는 게 아닐까.
6주 차에 도서관이 완공됐다. 교장 선생님이 내 이름을 새겨 넣으라고 하는데 차마 그건 못하겠어서 거절했다. 그냥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잘 쓰시라고 했다. 축구 용품들을 산 나머지 비용으로 책을 구매했다. 고심해서 고른 책 700권을 릴롱궤에서 구매해 먼저 채워 넣었다. 나는 세계관을 넓혀주고, 시선의 확장과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들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데, 그런 책들은 많이 없어 아쉬웠다. 도서관이 완공되고 구매한 책들을 집어넣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도 일부러 와서 기웃거리고 한 마디 툭툭 던져보는 이들이 많다. 옆에선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마을 청년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축구공 20개 전부를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은 아니었다. 관리를 하지 않으면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기에 권한을 교장선생님께 맡기고 관리할 사람을 세우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축구공을 한 시간만 가지고 놀면 안 되겠냐고 귀엽게 부탁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마을 전체에 활기가 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서관을 짓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트라우마의 기억이 남아 있었음에도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고, 택시나 버스가 없어 히치하이킹을 해야 하는 상황도 많았다. 인터넷은 터지지도 않고, 전화는 불통이라 인부 관리자와의 소통도 힘들었다. 자재들을 맞게 샀는지, 예산은 올바르게 쓰고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했고, 혹여나 새어나가는 돈이 있을까 봐 신경을 계속 써야 했다. 한국의 빠릿빠릿 문화와는 전혀 다른 '하쿠나 마타타, 문제없어 다 잘 될 거야'의 문화이다 보니 답답할 때도 무척이나 많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삐걱거림 속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내미는 손길이 되어준다는 것,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놓지 말아야 할 가치가 아닐까.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해준 후원자분들, 이집트에서 내려와 촬영을 담당해준 워킹 스튜디오 이정현 작가, 봉사를 하고 싶다며 지구 저 편 캐나다에서 날아온 제니, 남미에서 용기를 불어넣어준 꽃거지 형, 그 밖에도 많은 현지 친구들과 한국 엔지오 단원들, 말라위에 거주하시는 한인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프로젝트를 감히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 하나 그냥 되는 것이 없기에 이분들의 도움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다. 천 원을 후원했든, 백만 원을 후원했든, 통역을 도와줬든, 점심을 만들어줬든, 사진을 찍어줬든 누군가를 돕고 싶은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세상에 악한 것이 판치고, 누군가를 시기 질투하고, 끌어내리려는 모습이 사회 곳곳에 보인다 해도, 그 반대편에는 선으로 악을 덮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다. 따듯한 마음으로 이웃과 공감하고, 연대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선한 분들이 삶을 '살아내시고' 계셨다. 부족하고 부족하고 또 부족한 내 모습이지만, 이미 선으로 무장하고 앞서 걸어가신 분들이 많이 있기에,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이것밖에 없다며 불평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크나큰 행복이 될 수 있음을, 소유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존재하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