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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1. 2020

열정에 말라리아 한 스푼

 축구골대 용접을 마무리하고 운동장에 설치를 하고 있는데 비가 슬금슬금 내리기 시작했다. 그물까지 골대에 씌워야 해서 옮긴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물은 의외로 씌우기가 힘들었고 인부들과 한참을 낑낑댔다. 그 사이 비는 점점 더 많이 왔다. 계속하다간 몸이 쫄딱 젖을 것 같았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잠시 쉬고, 비가 그치면 다시 나와 그물을 씌웠다. 그렇게 운동장에 설치하고 그물까지 씌우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프로젝트 하나가 정말로 끝난 것이다. 이젠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면 됐다. 그간 고생한 나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었다.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졌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집에 돌아오니 밤 9시가 되었다.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뻗었다.


다음 날 일어났는데 머리가 띵- 한 느낌이 있었다. 뭐지 이거. 대학생 때 뎅기열에 걸린 적이 있다. 그때 조금 심한 감기가 걸린 듯 아닌 듯 쎄-했던 느낌이 생각났다. 비에 맞아서 감기에 걸렸나? 별 것 아니겠지 하고 다시 잠을 잤다. 3시간 정도를 잤을까, 일어났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왜 이래 이거? 뭐지? 


머리를 조금만 옆으로 흔들어도 높은 망루에서 뎅뎅거리는 종처럼 두개골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것 같았다. 팔과 다리에는 소름이 돋아있었다. 날이 춥나? 하고 커튼을 열어보니 햇빛이 쨍하게 내리고 있다. 전혀 추운 날씨가 아닌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갑자기 오한이 찾아왔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고 치아가 덜덜덜 부딪혔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오한이 나를 둘러쌌다.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추락하다가도 다시 위로 솟구쳐 올랐고 좌 우 양 옆으로 뛰어다녔다. 눈동자는 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따라갈라치면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당장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았다. 오한과 어지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구토가 나왔다.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통에 머리를 처박고 어제 먹은 음식물을 모조리 쏟아냈다. 그럼에도 속이 완전히 개워지지 않았다. 손을 목구멍에 집어넣어 다시 쏟아내기를 반복했다. 그 후에는 설사가 나왔다. 위와 밑으로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구토와 설사는 반복됐고 소변을 볼 때 빨간색 소변이 흘러나왔다. 피였다. 변기 물이 빨간 피로 물들었다. 알 수 없는 고통이 나를 끌고 갔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는 채 몸을 두고 정신이 붕 떠올랐다. 육체와 정신은 합쳐지지 못했다. 저 멀리 어딘가로 끌려가는 정신은 침대에 나자빠져있던 육체를 보았다.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육체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옆 방에는 네덜란드에서 온 소아과 의사 폴라인이 살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이 본국으로 출국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방 문을 두드렸다. 내가 답이 없자 문을 살포시 열었고 쓰러져있는 나를 발견했다. 조르바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할 수 있는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폴라인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알아챘다. 잠시 기다리라고 말을 하더니 몇 분 후 말라리아 진단키트를 사 왔다. 그녀는 진단키트의 사용법을 읽고 내 피를 뽑았다. 느낌으로 말라리아라는 걸 알아채고 진단을 했다. 곧 키트에 빨간 두 줄이 나왔다. 나는 이게 말로만 듣던 말라리아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아, 이게 말라리아였어? 아.. 말라리아.. 아프다. 너무 아프네.



말라리아 확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리칼과 몸통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이거 뭐야..? 왜 이렇게 아파..?라고 물었다. 폴라인은 내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 같다며 옷을 벗기고 적신 손수건을 가져와 몸을 닦아줬다. 그러나 그녀는 곧 비행시간이 다 되어 떠나야 했다. 나는 친했던 폴라인과의 마지막 헤어짐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짜증도 낼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을 뿐이다. 나는 혼자 알아서 해보겠다며 그냥 가라고 했다. 공항까지는 먼 거리였다. 그녀는 그냥 갈 수 없다며 캐나다에서 놀러 온 내 친구 제니를 불렀고, 결국 아픈 상태에서 폴라인과 작별인사를 했다. 눈물 없이는 차마 볼 수 없는 드라마도 아니고 이게 뭐야, 친한 친구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내다니. 폴라인은 골골대고 있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안아주고 공항으로 갔다. 폴라인에게 잘 가라고 했다. 돌봐줘서 고맙다고, 괜찮아지면 연락을 하겠다고. 


제니는 폴라인이 사 온 말라리아 약을 먹여주고, 나를 돌봐줬다. 약을 먹은 후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다시 일어나니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다. 몸은 한결 괜찮아진 듯했다. 아까처럼 깨질 듯이 머리가 어지럽거나 춥지는 않았다. 띵한 느낌만 있을 뿐. 제니는 안보였다. 내가 잠들어있으니 볼 일을 보러 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지만 뭘 해먹을 힘이 없었다. 옆에 보니 제니가 죽을 만들어 놓은 게 보였다. 고마웠다. 죽을 먹었지만, 먹자마자 설사를 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속이 더부룩하고 매스꺼움이 자꾸 일었다.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바닥에 구토를 했다.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약빨이 떨어진 것 같았다. 주위가 급속도로 추워졌다. 몸이 다시 덜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껴입었다. 반팔, 반바지, 긴팔, 긴바지, 잠바, 패딩 껴입을 수 있는 모든 걸 껴입고 이불을 덮었다. 그럼에도 오한은 여전히 내 몸을 감쌌다. 이불속에서 다시 덜덜 떨었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아플 때는 절대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체온을 떨어트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옷을 벗으면 추위에 떨다 죽을 것 같아 그러질 못했다. 그저 이불 밑에 웅크리고 누워 덜덜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숨이 가빠졌고 호흡이 짧아졌다. 나중에는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사람이 이렇게 아플 수가 있을까? 뎅기열에 걸렸을 때도 죽을 것 같이 아팠는데, 말라리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과 육체가 각각 분리된 것 같았다. 정신이 정신이 아니었고 육체가 육체가 아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죽는다면 어디로 가게 되는가,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가. 죽음이 눈 앞에 있는 느낌이었다. 죽음,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정말 죽겠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으면 어디로 갈까. 이런 생각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참을 그렇게 이불 밑을 파고 들어가 떨고 있는데 제니가 들어왔다. 제니는 들어오자마자 이불을 치웠고, 이런 상태로 있으면 안 된다며 잠바를 벗겼다. 나는 너무 춥다며 도저히 벗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벗으면 죽을 것 같았다. 체온을 재니 열이 40도까지 올랐다. 제니는 당황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누군가 부를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최선교사님에게 전화를 걸라고 말했다. 최선교사님은 한달음에 달려와주셨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 옷을 하나씩 강제로 벗기셨다. 나는 오한에 떨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제니와 선교사님은 땀에 온통 젖은 내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시며 돌봐주셨다. 시간이 좀 지난 후 병원으로 데려가 다시 검사를 했다. 이상하게도 첫 번째 병원에서는 말라리아가 아니라고 나왔다. 우리는 다른 병원으로 갔다. 그제야 말라리아라고 확정을 받고 입원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로 죽는 경우 초기에 대처를 잘하지 못해 죽는 경우가 많다. 24시간 이내에 대처를 잘해야 하는데 그 시간을 넘겨버리면 위험해지는 것이다. 나도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심각한 상황으로 빠졌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어떤 엔지오 단원 중 한 명은 초기 대응을 잘 못해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부모님까지 아프리카에 오셔서 마지막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이분은 병원에서 바로 진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진이 두 번이나 났었다. 때문에 말라리아가 아닌 그냥 감기라고 착각을 해 감기약을 먹으며 3일을 버텼지만 열이 점점 오르고 오한이 심해져 단순 감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이분을 데리고 다른 병원을 갔고 그제야 말라리아라고 판명이 났다. 그 후 이분은 헬기를 타고 말라위가 아닌 더 큰 병원이 있는 남아공으로 이송되어야 했으며 그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받고 나서도 부분 기억상실증과 트라우마로 힘들어하셨다고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정도로 초기대응이 중요하다. 다행히 지금은 건강을 되찾으셨다고 한다. 


나 또한 5일간 병원에 입원했었지만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니 차츰 건강을 회복해갔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있을까. 정말로 죽음을 보는 것 같았다. 강도의 칼이 떨어지는 순간의 죽음과는 또 다른 차원의 죽음이었다. 오한이 사라지고, 구토와 설사가 멎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병원 밖의  일상적인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건강이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었다니. 새 생명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도서관 완공을 잘하고 이렇게 아플 줄 누가 알았겠나. 아프리카는 마지막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말라리아 환자의 뒷모습






말라리아에서 완전히 회복하는 데는 1주일 정도가 걸렸다. 그렇게 아프던 몸이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니 신기하게도 금방 나았다. 회복을 하고 마을 봉사를 더 다녀왔다. 기존 치료가 끝나지 않았던 환자들을 치료해야 했기에 몇 주의 시간을 더 써야 했다. 


어느덧 말라위에 머문 지 1년이 지났다. 계약기간이 만료된 친구들도 하나 둘 고국으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미국으로, 누군가는 네덜란드로, 누군가는 한국으로. 아직 말라위에 남아있어야 하는 친구도 있었다. 다들 떠나고 난 빈자리를 바라보며 느껴지는 헛헛함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머나먼 아프리카 땅에서 만난 인연들이 참 많았다. 어떤 상황을 계속 겪게 되면 그 상황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먼 이국 땅에서의 헤어짐은 항상 낯설게 다가왔다.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때 묵직하게 내려앉은 공기는 우리의 시선을 자꾸만 아래로 끌어당겼다. 다음을 기약하며 또 보자고 해도 발걸음은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다 떠나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떠나는 시점에 맞춰 모든 활동을 마무리지었다.


먼 미래에 나이가 들면,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를 해야지'라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 생각이 이렇게나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었다. 계획에도 없던 아프리카 종단이라는 목표가 생기고 이 대륙에 발을 디딘 15년 12월, 이집트를 통해 들어온 이곳에서 어느새 1년 2개월이란 시간을 보냈다. 언제 1년이란 시간이 흘러갈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외로움에 지치기도 했고, 외국인은 무조건 돈이 많기 때문에 더 내야 하고, 더 줘야 한다는 몇몇의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정이 뚝 떨어지기도 했었다. 기나긴 역사 속 인종차별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인종차별을 당할 때면 화가 부글부글 끓기도 했다. 강도에게 당했을 때와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는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트라우마가 생기고 더는 이 고생을 하기 싫어 당장에라도 한국에 돌아간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한 마디로 이곳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탱해줬던 힘은, 병원을 오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 치료를 해줬을 때 받았던 그들의 마음이었다.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닌 마음이 듬뿍 담겨있던 사탕수수, 손을 꼭 잡아주며 미소를 보내오는 감사가 담긴 눈빛, 축구공 하나에 마을 사람 전부가 나와 소리를 지르고 좋아하고 행복해하던 하나하나의 모습들이 나를 이곳에서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지 않았나 싶다. 어차피 내가 치의학을 전공한 이유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겪을 일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미리 겪어봤으니 다시 왔을 때는 조금 더 숙련된 모습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버티게 했다.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것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누구 하나 급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와 누군가를 비교하지도 않았으며 화려한 페르소나를 쓸 필요도 없었다. 일을 하지 않을 때면 여유롭게 책을 읽고 깊은 공상에 빠졌다.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마음을 썼다. 그렇게 바쁘게만 살던 현대인의 삶에 여유가 찾아왔고,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편하게 살고자 하면 한없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이 땅이다. 나는 불편함을 끊임없이 가져왔던 것 같다. 일을 만들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여기서 배운 것은 이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의를 가지고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다 보면 꼭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를 잘 조율하고 풀어나가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 어떤 일은 누군가에겐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누군가에겐 심적/육체적 아픔이 사라지는 일일 수 있다. 


이 생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나도 편안함을 바란다. 걱정 없이 먹고 자고 놀고 화려하게 보여지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세상을 돌아다닐 때 보았던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작은 것 하나에 감사해할 줄 아는 사람들, 보여지는 것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 우리의 당연함이 그들의 당연함이 되지 않기에 고통받는 사람들, 아무런 연고 없이 세상에 던져져 희망을 품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세상을 보는 것만큼, 경험한 만큼 우리의 가치관은 형성된다. 돈에 대한 가치가 제일이라고 믿는 사람은 돈을 위해 살고 돈을 위해 죽는다. 그의 모든 세상은 돈으로 돌아간다. 사람을 돈으로 보고, 얼마를 버는지로 평가한다. 한 때 나도 그런 사람이 될 뻔한 적이 있다. 내가 가슴 깊이 느끼고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리게 만들어줬던 작가들이 하는 말에 비해 세상은 너무나 냉혹했다. 그런 가치는 온데간데없고 모든 게 돈으로 귀결되는 세상에 대해 나는 회의를 느꼈다. 회의는 곧 비관과 냉소로 이어졌다. 


그러나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이란 걸 먼저 알고 싶었다. 책장 깊숙이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던 로버트 기요사키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의 책에 빠져들어 전부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었고, 그 사회에서 살려면 돈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돈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 학교와 정부는 우리가 부자가 되는 걸 막고 있었다. 기요사키는 책을 통해 우리가 금융지식을 쌓고 돈을 공부하다 보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강조했다. 아, 내가 지금까지 잘못 살고 있었구나! 내가 가진 마인드는 부자가 될 수 없는 마인드였구나! 마인드가 바뀌기 시작했다.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 나도 부자가 될 수 있구나. 나도 화려하게 살 수 있구나! 그때부터 내 손에 들린 책은 카프카나, 소로우가 아닌 돈에 관련된 책이 되었다.


카프카나 소로우가 주장하는 내용은 돈이 되질 않았다. 이반 일리치가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아무리 설파하더라도 그건 돈이 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래서 그게 밥 먹여주나?라는 걸 묻는 나를 발견했다. 누구를 소개받더라도, 그 사람은 뭘 하는 사람인데? 많이 벌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정신 회로가 돈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이 회로를 가진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서울의 지리를 모두 꿰차고 있고, 어디 아파트가 얼마인지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인생의 정답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 또한 이 정답을 가지고 살다 보면 언젠가 부유해질 것이고, 그 부유해진 돈으로 편안한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돈에 묶이다 보면 자유치 못하게 됐다. 돈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과정 중에서 놓치는 가치들이 너무 많았다. 돈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게 했다. 100억을 벌고 싶다는 사람에게 돈을 벌어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세계여행은 가능하다고 했다. 젊을 때 세계여행을 하며 얻는 깨달음과 가치관의 형성과 나이가 들어서 하는 깨달음은 차이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당분간 돈에 미치고 싶다고 했다. 힘든 삶을 살아왔으니 돈 한번 왕창 벌어 떵떵거리며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생각을 존중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하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은 당연할 수 있기에. 


코로나의 여파로 묶인 2030의 돈들이 몇 달 전에는 부동산으로, 최근에는 주식시장으로 몰렸다. 미디어에서도 금융교육과 경제관념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은 너도나도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돈이 최고라고 외친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됐다. 이 모든 현상을 좋지 않다고만 말할 수는 없겠다. 극단적으로 치우치지만 않는다면, 돈 외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정신적인 가치를 알 수만 있다면 돈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건강한 일이라 생각된다. 돈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돈을 관리하고, 돈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만 한다면.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돈 외의 가치는 사라지고 돈이 전부가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말라위를 떠나는 글을 쓰며 당시에 썼던 글을 읽으니 그때의 나와 지금 나의 가치관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더 현실적이 되었으며 조금 더 속물 같은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 세상에 버림 당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내고 있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충분히 부유한 환경에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마음만 버리더라도 팍팍하기만 한 한국 사회에서 좀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말라위에서의 경험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고, 자산이었다. 그 가치를 잊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마지막 마을 진료


With Dylane and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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