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르바 Oct 21. 2020

쿠바 감옥

 봉사가 끝날 무렵 내가 세운 계획은 남아공으로 가서 자격증을 알아보고, 쿠바로 가는 것이었다. 쿠바를 거쳐 미국의 샌디에고로 간 후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캐나다까지 4300km를 걸어서 종단하는 Pacific crest trail(PCT)에 도전할 참이었다. 남아공에서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해도 프로세스를 밟기보단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사실 말라위에서도 치과 선교를 담당하셨던 K선교사님께서 앞으로 같이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을 주셨었다. 나는 감사하지만 1년간의 봉사를 마친 지금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PCT는 멕시코 국경의 Campo라는 국경마을에서 시작해 남캘리포니아 - 시에라 - 북캘리포니아 - 오레곤 - 워싱턴을 거쳐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까지 걷는 트레일이다. 총 4300km에 달하고 보통 5~6개월이 소요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엄청 빠르고 잘 걷던 체코인을 만났던 적이 있다. 어떻게 그리 빨리 걸을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PCT에 대해 설명을 해줬고, 그 길을 걸으면 순례길은 애들 장난이라고 말했다. 그 길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땐 웬 미친놈들이 4300km나 되는 길을 걷는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PCT에 대한 강렬한 느낌은 말라위에 있는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국내에도 이 길을 걷는 누군가가 있는지 찾아보았고, 마침 4명의 한국인들이 이 길을 걷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들의 블로그를 하나하나 읽는데 알 수 없이 북받쳐 오르는 감동과 떨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젊은 패기만으로 이런 어마 무시한 길에 도전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히말라야 한 번, 산티아고 순례길 한 번 갔다 온 경험이 전부인 나로선 4300km를 걷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PCT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고, 이 길을 생각할 때면 몹시 흥분되었다. 나는 결국 봉사가 끝나고 PCT라는 트레일에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말라위를 떠나 잠비아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고 보츠와나를 거쳐 남아공까지 내려갔다.




Cape Town




남아공의 치대는 프리토리아 대학에 있었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며칠에 걸쳐 학교를 들락날락거렸다. 다시 학생들과 교수들을 만나고 학과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정리를 하자면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 등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자격증이 있는 의사들은 이곳에서 면허를 바꿔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외 국가의 자격증을 가진 나라들은 편입을 해서 본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런 후에야 시험을 볼 수 있었고,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이곳에서 공부를 했었다면 자격증을 쉽게 취득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본과 1학년 때 남아공으로 편입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아쉬웠다. 


프리토리아에서 일을 본 후 다음 할 일은 미국 비자를 얻는 일이었다. PCT를 걷기 위해서는 3개월을 머물 수 있는 일반 ESTA비자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6개월간 머물 수 있는 B1/B2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인터넷 후기를 보니 비자 발급에 떨어진 사람들의 후기가 많았다. 한 번 인터뷰를 보는데 160불을 내야 하니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번 떨어지면 그때 무슨 문제가 있어서 떨어졌는지 묻는 질문부터 시작해 더 까다로워지기 때문에 단번에 붙는 게 제일 좋았다. 며칠에 걸쳐 온라인으로 서류 작성을 했고, 인터뷰 날짜를 기다렸다. 남아공의 미 대사관은 요하네스버그에 있었기 때문에 프리토리아에서 다시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왔다. 


인터뷰 날짜가 다가올수록 긴장이 됐다. 혹여나 말실수를 해 떨어지게 되면 돈과 시간만 날리는 셈이니 무엇을 질문할지,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를 해야 했다. 미국에 가는 이유와,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으며, 며칠 일정으로 가고, 언제 귀국을 할 것인지 등. 이 사람들이 PCT를 알고 있을까? 알기만 하면 통과하기가 수월할 텐데. 한국에선 이미 PCT에 도전하는 사람들 중 비자받기에 실패한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3번이나 떨어진 사람도 있었다. 이 길을 걷는다고 해도 명확한 직업이 없거나, 일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터뷰에서 떨어트렸다. 그들은 인터뷰이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고 6개월을 걷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인터뷰 당일, 긴장된 마음으로 미 대사관을 찾았다. 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가 울면서 인터뷰어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인터뷰를 보던 대사관 직원은 딱 잘라 거절하며 안된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크게 울며 밖을 나갔다. 저 모습이 내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곧 내 이름이 불렸고 인터뷰를 보는 직원 앞에 긴장된 모습으로 섰다. 왜 미국에 가려고 하니?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서류들을 꺼냈다. PCT라는 길에 대한 정보가 담긴 서류였다. 서류를 건네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떤 루트를 걷게 되며, 며칠이 소요되는지, 얼마가 드는지, 왜 걸으려고 하는지, 이 길을 걷기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과 히말라야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걸 어필했다. 그녀는 산티아고 순례길도 알고 있었고, PCT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자신도 순례길을 걷는 게 소원이지만 PCT는 엄두도 못 내겠다고 했다. 곰을 조심해야 한다며 잘 다녀오라고 웃으며 비자를 내주었다.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쉽게 끝나버린 기분 좋은 인터뷰였다.


PCT는 보통 4월에 시작하는 것이 적기다. 일반 성인의 속도로 3월에 시작하면 남캘리포니아를 지나 시에라 산맥을 통과할 때 녹지 않은 눈 때문에 위험하다. 5월에 시작하면 10월 초가 돼서야 캐나다에 도착할 수 있는데 그땐 마지막 구간인 워싱턴에 눈이 많이 쌓여 완주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때문에 많은 하이커들이 4월 중순에 시작을 하고, 9월 중순~말에 하이킹을 끝낸다. 내가 비자를 받았을 때는 2월 말이었고, 한 달여의 시간을 보낼 장소가 필요했다. 남아공에 계속 있기에는 물가도 비쌌고 요하네스버그가 주는 느낌이 안전하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여행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디가 좋았고 어떤 게 재밌었고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길거리를 지나는데 누가 목을 내리쳐서 가진 걸 모두 빼앗겼고, Atm에서 돈을 뽑는데 총을 든 강도가 나타나 돈을 모두 빼앗겼고, 길거리에서 총을 들이밀어 가방을 빼앗겼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온통 빼앗긴 얘기뿐이었다. 아무래도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그간 가보고 싶었던 쿠바로 목적지를 정했다. 다녀온 모든 이들이 사랑에 빠졌던 나라 쿠바, 그 기대감을 안고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터키를 거쳐 쿠바에 도착했다. 이민국을 통과하기 위해선 비자를 사야했다. 비자는 50불이었다. 돈을 내려고 지갑을 꺼냈는데, 가지고 있던 현금 $350이 없었다. 어..? 분명 여기에 넣어놨는데! 이민국 앞에 멀뚱멀뚱 서서 가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여행자들은 현실 부정을 자주 하곤 한다. 특히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 


그러나 그럴 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만히 기억을 돌아보니 요하네스버그의 숙소에서 일하던 청소부가 생각났다. 그곳에 있을 때 안 그래도 도난 사건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대부분 청소부에 대한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도난사건은 일어났고 컴플레인도 계속 나왔다. 나도 그렇게 당한 듯 싶었다.


결국 현금이 없던 나는 시티은행 카드를 내밀었다. 창구 직원은 내게 카드로는 계산이 불가능하다며 이민국 직원 한 명을 붙여줬다. 밖으로 나가서 돈을 뽑아올 수 있게 도와주라고. 이때까지만 해도 현금은 도난당했지만 곧 쿠바를 여행할 생각에 행복했다. 직원과 함께 밖으로 나가 Atm기계 앞에 서서 카드를 집어넣었다. 얼마를 뽑을지 정하고 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transction has denied라는 말만 반복해서 나올 뿐, 돈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Atm 기계에서도 시도를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직원은 아마 아메리카 카드라서 안 되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읭. 미국 카드는 쿠바에서 안 먹히는 건가? 당시는 미국과 쿠바와의 관계가 그런대로 풀린 상태여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라고 간단히 생각했다. 


시티은행 카드를 포함해 내가 가진 카드는 총 3개였다. 그중 하나만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2개는 짐을 붙인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가방은 이민국 밖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을 터였다. 나는 직원에게 다른 카드 두 개가 가방 안에 들어있으니 가방을 가지고 오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직원은 안된다며 나를 다시 공항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직원을 계속 불렀다. 그럴 때마다 직원은 내게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기다리라고!!"만 반복했다. 기다리기를 5시간,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자꾸 기다리라고만 하는 거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이민국 앞에 퍼질러 눕기도 하고, 쿠바에 입국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앉아서 멍하니 쳐다보기도 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5시간 후 나를 찾아온 직원은,


- 가방 들고 나 따라와

- 어디 가는데?

- 타운에 있는 이민국 센터. 그리고 다시 터키로 다시 갈 거야.

- 뭐라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나와 차를 한 시간 타고 시내로 갔다. 쿠바의 기억은 그때 조그마한 창문으로 본 게 전부다. 이민국 센터라는 곳에 도착해 나를 집어넣은 곳은 웬 허름한 창고였다. 그곳에서 30분을 더 기다렸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캐나다에서의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30분이 지나자 머리에 베레모를 쓰고 어깨에 총을 멘 남자가 따라오라고 했다. 그를 따라 좁고 어두침침한 통로를 걸었고, 때 묻은 노란색이 칠해져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에 있던 짐들을 다 꺼내야 했으며 셔츠와 바지, 속옷, 팔찌, 발찌, 목걸이 등도 다 벗어야 했다. 총을 소지한 군인은 옆에 서있고 이민국 직원은 내게 옷을 모두 벗은 채로 뒤를 돌아 손을 들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켰다. 군인이 몸을 만지며 수색했다. 혹여나 몸에 마약을 소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검사라고 했다.


수치스러웠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터키로 돌아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옷을 다시 입으며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돈이 없어서'라고 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돈이 없어서라니. 심지어 그때 쿠바엔 세계여행을 하던 내 친구들이 있기도 했다. 


- 나 돈 있어! 카드에 돈 들어 있다고! 지금 당장 이 카드 가지고 Atm으로 가면 돈 뽑을 수 있다니까? 내 친구들도 지금 쿠바에 있어! 친구들한테 전화하면 걔들이 와서 돈 내줄 거야! 고작 50달러 아니야? 내가 50달러도 없을 것 같아?!!! 


악에 받친 목소리로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들은 고개를 휙휙 젓더니 보스가 결정한 일이라며, 'You have no money'라는 말을 띄엄띄엄, 영어로 지껄였다. 내 모든 소지품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 가고, 나의 신상을 조사하며 내가 한마디 하려 하면 조용히 하라고 재갈을 물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야ㅠ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없으면 여기 왔겠냐고. 돈이 없다는 가정을 만들어 놓고 터키로 추방시킨다고? 그들은 이런 내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 여권에 스탬프가 왜 이렇게 많지?

- 난 여행자야. 여행을 많이 했으니까 그렇지.

- 여행을 왜 하지?

- ......

- 카드에 얼마가 있지?

- 4000불 정도.

-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있을 수 있어? 아무래도 넌 마약 딜러가 아닐까 해.

- ......


당시 나는 PCT를 하기 위해 아는 형에게 400만 원을 빌린 상태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이곳의 평균 노동자 임금은 200~300불이다. 한화로 2~30만 원 정도 된다. 그런 나라에서 4000불이라는 돈은 엄청 큰돈이다. 그것도 젊은 놈이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의심을 할 법도 했다. 이들의 삶에서 '여행'이라는 단어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특권층 빼고는 몇 되지 않았다. 노동 임금이 너무 적고 함부로 국가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조차 별로 없기 때문에 여행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나는 그렇게 3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 후 나를 어두운 통로로 끌고 갔고 그곳엔 철창으로 막혀있는 독방이 있었다. 퀴퀴한 냄새와 습기가 들어찬 그곳엔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핸드폰과 전자책, 연필, 공책 등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오로지 내 몸뚱이와 세면도구뿐이었다. 독방 안엔 죽은 개구리와 바퀴벌레가 있었다. 각종 날파리와 모기들이 나를 반겼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철창 사이로 음식을 줬다. 식빵 한 조각과 스팸 비스무리한 것, 빵에 발라먹는 잼, 소금이 잔뜩 들어간 국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아침 6시에 쿠바에 도착해 저녁 6시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나는 어떻게 될까. 다시 돌아갈까? 진짜로 날 터키로 보낼까? 겁만 주는 게 아닐까? 혹시 사정하면 이 땅에 남을 수 있을까? 눈물이 흘렀다. 그냥 마구마구 흘렀다. 


더럽고 냄새나는 침대에 누워 어둠이 깔린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서러웠다. 죽고 싶었다. 내 인생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 여행하는 것처럼 별 다른 문제 없이 돌아다니는 게 내가 원하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내가 믿는 신은 나를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으셨나 보다. 나는 각종 어려움과 고난에 빠지기 일수였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다 큰 뜻이 있어서 라고. 그래.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게 믿고 싶은데 이런 상황이 닥쳐올 때면 믿음 대신 원망만 잔뜩 나온다. 원망과 자책, 허탈, 무기력, 비참함과 쓰라린 기억들이 몰아치듯 나를 감쌌다.


철창에서의 밤이 그렇게 흘렀다. 다음 날 아침으로 빵 한개와 스팸 한 조각을 먹었다. 하나 더 먹으려 했더니 소리를 빽- 지르며 안된다고 한다. 나참 서러워서 살겠나. 이민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이 감옥 같은 곳은 불법체류자들이나 어떤 이유에서건 여권이 없는 이들을 가둬놓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에리트리아,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말리, 기니, 러시아, 중국, 이태리 사람들이 갇혀있었다. 그들은 각자만의 이유로 이곳에서 감방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일 무서웠던 건 며칠 동안 이곳에 있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이는 두달 동안 갇혀있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1년이 넘게 갇혀있는 이도 있었다. 


아침을 먹은 후 총을 든 군인이 소리를 지른다. 모두 방으로 들어가! 각자가 방으로 들어가면 하나 둘 철창문을 잠근다. 나는 철창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이 shake it 들아 문을 왜 잠그냐고, 내가 범죄자냐고.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이곳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철창은 나를 가둬놓았으며 나의 자유는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모든 통제하에 철저하게 감시되었다. 방에 박혀서 5-6시간을 갇혀 있었고 그 안에서 홀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약해져 가는 멘털을 강하게 붙잡아야 했다. 정신을 똑바로 잡지 않으면, 자유를 억압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만큼 화가 났고, 억울했다. 


이곳에 처음 들어올 때 보스를 만나 이야기를 시켜주겠다는 약속은 철저히 무산됐다. 죄수를 얌전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한 시간이었다. 20평 남짓한 시멘트 운동장에 모여 이곳의 멍청한 간수들을 욕했다. 그 시간은 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두운 공간에 있다가 밝은 빛을 받으면 몸과 정신이 깨끗해졌다. 누군가와 말을 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다니. 내 말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군인과 직원들 속에서 그나마 힘이 되었던 건 에리트리아와 말리 같은 전쟁지역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청년들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벗어나야했다. 마음은 벌써 쇼생크 탈출을 찍고 있었다.

이전 23화 열정에 말라리아 한 스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