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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1. 2020

Pacific Crest Trail


 나를 터키로 보낸다고 했다. 터키로 가게 되면 PCT 전까지 남은 한 달을 어디서 보내야 할까. 터키에 남아 있어야 하나, 다른 나라를 가야 하나. 조금은 이성을 되찾은 듯싶었지만 도무지 하릴없는 감방 안은 나를 다시 미치게 만들었다. 우울이 찾아왔다. 그 우울감을 그대로 끌고 와서 감방 벽에다 수기를 적었다. 원래는 방으로 연필을 가지고 올 수 없지만 옆 방의 에리트리아 친구에게 몰래 빌렸다. 터질 것 같은 이 감정을 어디든 배설해야 했다. 수기를 길게 적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부디 이 글을 보는 한국인은 없기를. 혹여나 이 방에 갇혀 내 글을 보는 한국인이 있다면 여기로 이메일을 한 번 주시오. 감방 동지끼리 밥이나 한 끼 합시다 라며 이메일 주소도 적었다. 점점 미쳐가고 있는 듯했다.


보스는 여전히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나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그나마 이성을 되찾았다. 여전히 철창에 갇혀 있었지만 정신을 부여잡았다. 아니 부여잡아야 했다.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알려주지 않는 것이 제일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이 정도에 무너질 순 없었다.


조금 후면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운동장에서의 그 한 시간은 유일한 낙이었다. 그때 만나는 감방 동지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온 키 작은 아프리카 남성은 자신이 그 나라의 코미디언이라고 했다. 영화에도 나오고, 아무튼 유명인사라고 했는데 나중에 핸드폰을 돌려받으면 꼭 찾아서 SNS 친구를 요청하라고 했다. 말리에서 온 친구는 불어로 된 책을 가지고 다니며 계속 읽었다. 러시아에서 온 아재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가만히 햇빛을 쬐며 앉아있었다. 가끔 운동장에는 나오지 않고 철창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 슬쩍 봤는데 배가 엄청나게 나온 꼬불머리 아재였고 벌써 수개월 째 이곳에 갇혀있다고 했다.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운동장 시멘트 벽에는 각 나라의 말로 욕이란 욕이 다 적혀 있었다. F*** 욕이 제일 많았다. 중국어로도 뭐라 뭐라 쓰여있길래 물어봤더니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 하루 전 이걸 써놓은 중국인이 나갔다고 했다. 그 또한 중국 욕이었단다. 꼬부랑거리는 아랍어도 있었고, 그림 같은 문체로 적혀놓은 것도 있었는데 다 쿠바를 욕하는 말이라고 했다. 한국말은 적혀있지 않아 나가기 전에 채취를 남기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에리트리아와 코트디부아르 친구들과 친해졌다. 잡담을 떨다가 지겨워지면 재미난 일을 구상했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열매들을 구석에 있는 하수구 구멍에 던져 집어넣었다. 그 짓이 뭐가 그렇게 재밌던지 깔깔대며 해댔다. 멀뚱멀뚱 지켜보던 러시아 아재도 심심했던지 옆으로 슬쩍 와 게임에 조인했다. 자유로웠던 한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간수가 시간이 다 됐다며 들어오라고 하면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고 졸라 두 시간을 머물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이 시간은 소중했다. 


삼일째 아침, 나를 깨우는 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리아노, 꼬리아노!" 나는 벌떡 일어나 눈곱 낀 눈으로 경관을 바라봤다. "짐 싸서 나와". 짐은 세면도구밖에 없었다. 나오라고? 풀어주는 건가? 터키로 다시 가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우선 밖으로 나오라고 하니 얼른 따라갔다. 따라가는 와중에 간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운동장에 들어가 커다랗게 한국말을 남기고 왔다. 궁금하신 분은 쿠바 감옥에 한번 가보시길 ^^..

감방 동지들은 내가 떠나는 걸 알았는지 졸린 눈을 비비며 철창 안에서 잘 가라고 인사를 해주었다. 철창 안과 철창 밖에서 손의 손을 잡고, 동무 꼭 살아서 만나자우 같은 느낌으로 인사를 했다. 철창문 몇 개를 통과해 처음 왔던 창고로 들어갔다. 구석에 처박힌 내 짐들이 보인다. 나머지 짐을 가지고 군인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두 눈을 감고 바깥세상의 공기를 마셨다. 길고 긴 3일이었다. 다시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나를 상상했다. 아- 자유가 이렇게나 좋은 거였구나.


몇 명의 군인들과 함께 차에 올라 타 공항으로 갔다. 나는 터키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고 했다. 공항에 도착한 군인이 내게, '너 카드 된다고 했지? 한번 가서 해봐' 라며 비웃는다.  나는 Atm 앞으로 가서 신경질적으로 카드를 넣었다. 기계에선 돈을 얼마 뽑을지 물었다. 100달러를 뽑았고, 뽑자마자 뒤를 돌아 소리를 질렀다. 


- 봤냐? 돈 있잖아!!! 


군인은 당황해했고, 상관을 불러오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상관이 왔고 그에게 100달러를 디밀며 다시 상황 설명을 했다.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처넣은 사실에 대해 따졌다. 그들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자신들의 실수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항공사 직원들과 군인들, 공항에 있던 이민국 직원까지 내게 찾아와 사과를 했다.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추방하는 서류를 만들어 놓고, 감옥에 3일 동안이나 처박아놓고, 이제야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책임은 아니라고 한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그럼 돌아가지 않아도 되냐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란다. 서류 작업이 다 끝났기 때문에 바꿀 수는 없다고. 나를 마지막까지 배웅 및 감시했던 이민국 직원은 미안한 표정과 함께 내일 다시 오라고, 내일 오면 문제없을 거라고 말한다. 쿠바와 터키가 무슨 서울과 부산이니? 오늘 갔다 내일 오게?


그렇게 나는 다시 터키행 비행기를 탔다. 중간에 베네수엘라를 들려 7시간을 경유했다. 베네수엘라에서 터키로 가는 비행 편은 심하게 흔들렸다. 왼쪽에 앉아있던 쿠바 할머니가 바지에 오줌을 쌌다고 오른쪽에 앉은 베네수엘라 사람이 통역을 해줬다. 웃기긴 했는데 비행기가 더 심하게 흔들리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오른쪽에 앉은 베네수엘라 사람은 고개를 박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쿠바 할머니도 울면서 승무원을 부른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도, 저 멀리에 앉아있던 누군가에게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많이 흔들렸고,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 심장이 위아래로 계속 철렁거렸다. 이렇게 흔들리는 비행기를 타본 적은 처음이었다. 많은 사람이 Oh God, 이라며 두 손을 모으고 신을 찾았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떻게 죽을까?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을까?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라는 상상뿐이었다. 나 또한 너-무 무서웠고, 잔뜩 겁을 먹었다. 평소에 탔던 비행기의 흔들림보다 훨씬 심했다. 그 긴장은 1시간 내내 이어졌지만 다행히 아무런 사고 없이 터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터키 공항에 도착하니 공항 직원이 친절하게도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민국으로 데려갔다. 어휴.... 한숨만 나왔다. 또다시 이민국에서의 지난한 기다림이 시작됐다. 이번엔 터키 공항이라니.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고 이민국 직원은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또 한 번 안겨주었다.


- 넌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갈 거야


나는 4일간 연속으로 남아공 - 터키 - 쿠바 - 베네수엘라 - 터키 비행을 했다. 각각 10시간, 13시간, 4시간과 11시간을 내리 탄 후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비행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 의지는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왜???? 왜 남아공이야??? 쿠바에서 터키로 가면 끝이라고 했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땐 무조건 처음 출국 지로 되보내게 된다. 내가 쿠바로 출발했을 때 남아공이 출발지였고, 터키는 경유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는 터키가 아닌 남아공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터키에 남아있을 수도, 다른 나라로의 이동도 불가능했다. 오로지 남아공이었다. 내가 다시 10시간을 타고 요하네스버그로 간다면 나는 감옥에서부터 쌓여왔던 분노를 호스텔 청소부에게 모두 풀지도 몰랐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은 그 누군가를 뒤집어 놓았을게 뻔했다. 


나는 차라리 비행기에서 뛰어내릴지언정 남아공은 절대 못 가겠다고 했다. 어쩌면 비행기를 하이젝 할 수도 있다며 반 협박을 했다. 그들은 이미 내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를 해줬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차라리 내 나라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는 편이 나를 국제 테러범으로 만들지 않는 지름길이야...라고 마음은 외치고 있었다. 결국 이민국 직원들은 나를 남아공이 아닌 한국행 비행기로 바꿔주었다. 그렇게 나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몇 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인생은 절대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의도치 않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익숙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공항 냄새, 간간이 들려오는 한국 방송, 한국말, 편의점, 바나나우유. 아, 정말 한국에 도착했구나. 실감이 났다. 쿠바로 떠난다던 내가 감옥에 갇혔고, 한국으로 추방당했다는 걸 알리자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셨다. 친구들은 출소를 축하한다며 순댓국집에서 두부를 선물로 주었고, 출소 축하합니다 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순댓국밥 주인아주머니도, 옆자리에 앉은 회사원들도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2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PCT 시작 전 모습


혹시나 쿠바와 캐나다에서의 일을 문제 삼을까 싶어 미국 이민국을 지날 때 가슴 조리며 인터뷰를 했다. 직원은 PCT 퍼밋과 비자를 보더니 6개월을 걷는다고? 대체 왜?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사람들을 만나 PCT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걸 왜 걸어?, 시간 아까워, 취업해야지, 여행은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 등등 여러 이유로 나를 말렸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친구들은 나를 보며 혀를 찼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할 때의 동기는 중요하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 동기를 찾는 일이 '무조건'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꼭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가슴이 뛰고, 설렌다면 아무런 동기가 없더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내겐 PCT가 그런 일이었다.


PCT는 6개월이라는 시간을 걷는 만큼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매년 3000명 이상의 하이커가 도전하지만 완주율은 20프로 정도라고 한다. 장비가 부실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텐트, 침낭, 가방, 트레킹 폴, 스토브, 가스, 정수 필터기, 반팔, 반바지 하나, 속옷 하나, 경량 패딩, 5일 치 음식을 준비했다. 보통 머쉬 포테이토나 라면, 멕시코의 건조 쌀밥, 또띠아, 참치, 누텔라, 건조과일, 식빵, 트레일 믹스 초콜릿, 에너지바 같은 것을 먹는다. 5일 치 음식과, 한 번 걸을 때 적게는 3리터에서 5리터의 물을 가방에 넣고 갖가지 장비들과 함께 걸어야 하니 무게는 15킬로에서 20킬로 이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가벼운(대신 비싼) 장비를 사용하는 게 좋고. 음식은 가능하면 가볍게 하는 것이 좋다. 한번 트레일에 들어가면 하루에 20~50km 사이를 걷는다. 3일 내지는 5일 동안 산행을 이어가며 길어질 땐 일주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 산행을 할 때는 텐트 생활을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나, 어딘가에 고여있는 물, 말들이 먹는 물을 정수해서 마시게 된다. 텐트와 침낭은 한국 제로그램 사장님의 후원으로 저렴한 값에 구할 수 있었고, 스토브나 가방, 트레킹 폴 등은 샌디에고의 REI 아웃도어 매장에서 구매했다. 





PCT를 걷는 사람들을 PCT 하이커라고 부르지만, 우리끼리는 Hiker Trash(노숙자와 비슷한 개념),라고 부른다. 캘리포니아와 오레곤, 워싱턴이라는 긴 길을 매년 지나는 하이커들이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Respect을 보내고 좋아해 준다. 마을에 도착해 길을 걷고 있으면 차에 탄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Hey! Are you a PCT hiker?라고 묻는다. 맞다고 하면 우리 집에 자리 남는데 자고 갈래? 라던가 먹을 것을 사주고 차를 태워주기도 한다. 이런 분들을 Trail angel이라고 부른다. 마을에서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물이 없이 30킬로를 걸어야 하는 사막 구간이나 곳곳에 하이커들이 통과하기 어려운 지점에 천막을 크게 쳐놓고 초콜릿, 콜라, 아이스크림, 음료수, 치킨, 과자 등을 준비해 놓기도 한다. 뜨겁고 힘든 사막을 걷다가 콜라나 물이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를 만난다면 오아시스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깜짝 선물을 우리는 Trail magic이라 불렀다. 이들의 이런 도움은 순전히 머나먼 길을 두 발로 걷는 이들에 대한 존경 때문에 이루어진다.


출발지점인 샌디에고에 도착하면 Scout & Frodo라는 트레일 엔젤이 있다. 이 노부부는 PCT를 처음 시작하는 하이커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트레일을 걸으며 조심해야 할 주의사항과 이 길에서 즐길 수 있는 PCT의 문화를 알려주는 트레일 엔젤이다. 장거리 하이킹 경험이 없는 하이커들은 이들 부부의 헌신이 큰 도움이 된다. 나 또한 이곳에 3일간 묵으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브라질, 홍콩,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소개를 하고 어떻게 이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길에서 만난다면 잘 부탁한다며 출발하기 전의 소감을 나눴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프랑스 친구
PCT 지도, Campo - 출발지점



스콧네 집에 걸려있는 PCT 지도에서 우리의 현재 위치는 제일 아래였다. 이 길을 내일부터 걷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순례길을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얼굴에 서렸다. 우선 하고 싶어 오긴 했는데 과연 끝낼 수나 있을지 미지수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 설렘, 긴장과 두려움이 섞인 밤이 지나 새벽 5시가 됐다. 하이커들이 부스럭대며 하나둘씩 일어났고, 첫날의 시작인 멕시코 국경으로 향하기 위해 쌀쌀한 새벽 공기를 털어냈다.


오전 7시, 멕시코 국경 앞에 놓인 PCT 비석 앞에 섰다. 20여 명의 하이커가 차례대로 사진을 찍는다. 비석에 올라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점프를 뛰기도 한다. 우리 앞 뒤로 다른 20여 명의 하이커들이 있다. 그렇게 4월 초-중순이 되면 매일매일 전 세계에서 온 하이커들이 비석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기나긴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의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우리를 감쌌다. 한 발을 내밀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출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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