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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1. 2020

팔이 잘리거나 목이 잘리거나

 말라위에서의 생활은 대체적으로 여유로우나 자칫 잘못하면 여유로움이 외로움이 되어버린다. 저녁 6시면 길거리의 불이 꺼지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여러 엔지오 단체에서 파견 나온 단원들과 함께 어울려 놀거나 수다를 떠는 일이 그나마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길 없는 외로움은 나를 자주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집 앞에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지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친구들과의 추억도 떠올랐고, 한국에 있는 가족도 생각났다. 얼마나 큰 일을 하겠다고 이곳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까. 외로움은 공허함을 만들고, 공허함은 회의 섞인 시선을 가져다주었다. 무엇이 그토록 공허했을까. 


친구들은 미국과 캐나다로 건너가 인턴십을 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깨끗하고 빛나는 덴탈 체어 옆에서 당당하게 찍은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내가 일을 하는 공간을 생각했다. 내가 꿈꿔왔던 덴탈 체어와는 많이 동떨어져있었다. 여기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면 모든 상황과 환경에 회의가 몰려왔다. 그렇게 공허함에 빠져 어두운 밤 길을 걸어 다니던 그 날, 사건은 벌어졌다.


내가 집 밖을 나선 건 저녁 7시였다. 한국으로 치면 꽤나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나는 그나마 불이 켜져 있는 시내로 나갔다. 말라위에 머문 지 7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기에 웬만한 동네는 다 꿰고 있었고, 저녁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한 마디로 안전불감증에 걸려 있었다. 시내를 걸었다. 군데군데 불이 켜져 있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어두웠다. 시내 뒤편에는 흙이 깔려있는 넓은 공터가 나왔다. 그 공터에서 말라위 사람들은 차를 가져와 음악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술을 마셨다. 우리에게도 불금이 있듯, 이들에게도 불금이 있었다. 이곳은 말하자면, 말라위판 야외 클럽인 셈이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클럽에 갔지만 그렇지 않은 스트릿 아티스트들은 이곳에 모였다. 이곳 분위기는 꽤 괜찮았다. 날 것 그대로의 말라위를 보여주는 듯했다. 한 바퀴를 돌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넓은 공터라 음악을 아무리 크게 틀어놔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았다. 춤을 추는 남녀 사이로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목에 나무 상자를 걸고 돌아다녔다. 나무 상자 안에는 담배가 종류별로 들어있다. 사람이 부르면 달려가 담배 한 까치를 주고 100원을 받는다. 옷은 구멍이 나있고 신발은 한 짝만 신고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잠잘 곳이 없어 풀 숲에서 잠을 잔다. 한 둘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아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었다.


야외 클럽을 즐기는 사람들과 담배 파는 아이를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밤 9시가 다되어갔고 짙은 남색 하늘에는 청초한 달이 떠 있었다. 집으로 가려고 평소 다니던 길 쪽으로 걸었다. 지름길이었고, 갈색의 무성한 잡초들 사이를 지나야 했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왼쪽으로 돌아야 하는 코너가 보였다. 코너 뒤에서 사람 두 명이 나왔다.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앞을 걸었다. 그 두 명과 내가 옆으로 지나가는 순간 한 명의 팔이 내 허리를 붙들었고 나를 넘어트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를 넘어트린 놈은 내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뒤에서 꽉 붙잡았다.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팔꿈치로 뒤에 있는 놈의 얼굴을 찍었다. 내 손에 붙들린 핸드폰은 플래시를 켠 채 콘서트의 조명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다른 한 놈이 발버둥 치는 나를 보고 칼을 번쩍 들었다. 커다란 마체테(코코넛 자르는 칼)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칼로 나를 내려 찍으려는 듯 왼 손으론 내 얼굴을 잡고 오른손으로 내려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발버둥 쳤다. 그는 자칫 잘못하다간 같은 팀을 내려칠 수도 있을 것 같아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내 눈 앞에선 커다란 칼이 위아래로 왔다 갔다 했다. 내 얼굴을 조준하는 것 같기도 하고 팔을 조준하는 것 같기도 하는 마체테가 바람을 훅훅 가르며 나를 위협했다. 그대로 목이 잘려 죽거나, 팔이라도 하나 잘리거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 짧은 몇 초 안에 수십 가지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부모님, 친구들, 치과, 여행, 꿈, 미래 등.


나를 조준하던 놈은 그 큰 칼로 내 머리 옆 바닥을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도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칼을 재빠르게 다시 들고 또 위아래를 조준했다. 나는 쥐고 있던 핸드폰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한 번 더 내려치는 듯 한 모션을 취하더니 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밟고 핸드폰을 주워 도망갔다. 나를 뒤에서 안고 있던 놈도 그를 따라 재빠르게 도망갔다. 심장은 벌렁벌렁 거리고 숨은 가파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야이 개$#@들아!!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배를 순간적으로 가격 당하고 꽉 붙들리고 있어 그런지 쇳소리만 흘러나왔다. 나는 옆에 있는 주먹만 한 돌을 들고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눈 앞에 뻔히 보이게 달려가는 놈들을 그대로 보내기 싫었다. 비틀거리며 쫓았지만 그들이 사라진 곳은 어두컴컴한 어느 골목이었다. 거길 들어갔다간 정말 위험하겠다 싶어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다. 그 옆에 경찰서가 있었다. 경찰들에게 설명을 하고 같이 골목으로 돌아왔다. 경찰들은 총을 들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도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 또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를 위협할지 몰랐다. 경찰들에게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했다. 잡는 건 무리일 것 같다고 했다.


경위서를 대충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잡힐 거란 기대 따윈 없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방금 전 일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눈을 감을 때마다 마체테가 얼굴 위로 떨어졌고 허리가 콱 잡히는 느낌이 떠나질 않았다. 끔찍하고도 생생한 느낌이었다. 트라우마는 한 달가량 지속됐다. 병원 외엔 아무데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바깥 세상이 조금만 어두워져도 두려움이 찾아왔다. 현지 사람들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팔이라도 하나 잘렸다면 지금 내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목이 잘려 죽었다면 내 가족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고작 핸드폰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곳. 이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은 이 사건 이후로 더 커졌다.







강도에게 당한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곳은 가지 못했다. 컴컴한 곳에 들어가면 갑자기 칼이 튀어나오고 누가 허리를 잡을 것만 같았다. 그날 밤을 생각하면 등골에서 소름이 올라왔다. 일부러 그런 시간 때와 장소를 피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아무것도 없는 평지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집으로 들어갔다. 두 달 간을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그날도 나는 일과를 마친 후 밖으로 나와 평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던 구름, 파란 하늘. 배가 고파졌다. 앞에 보이는 Kfc를 들어갔다. 치킨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평소 자주 보이던 Homeless 아이들이 빈 물통들을 들고 돌아다녔다. 그중 한 아이에게 와보라고 했다. 그 빈 물통들로 뭘 할 거냐고 물었다. 아이는 하나의 물통을 팔면 100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자기에게 3개가 있으니 300원을 번다고 했다. 나는 그 돈으로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아이는 오늘 먹을 시마(옥수수를 가루로 내어 만든 주식)를 사 먹는다고 했다. 오후 4시가 된 시점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Kfc를 가리키며 저곳에 가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100미터 앞에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 차에 구걸하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를 불렀고, 이리 와보라고 했다. 아이는 달려왔다. 밥을 먹었냐고 물으니 안 먹었다고 했다. 이 아이 두 명을 데리고 Kfc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낯선 시선은 아이들에게 여긴 니들이 올 곳이 아닌데,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위축되면 아이들 또한 위축될 터였다. 아이들에게 어깨를 쫙 피고, 당당하게 들어가라고 했다.


일전에 병원에 온 어떤 환자에게 레진 치료를 덤으로 해준 적이 있다. 환자는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본인이 kfc에서 매니저로 있으니 언제든 오면 잘해주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생각났다. 나는 사람들의 낯선 시선을 뒤로하고 직원에게 매니저를 불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매니저가 바로 나왔다. 나를 기억했고 잘 왔다며 반겨줬다. 아이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이곳에 아이들을 데려와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혹여나 손님들에게 컴플레인이 나오는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매니저는 매장의 눈치를 조금 보더니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컴플레인이 들어오면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했다.



지악, 조셉



아이들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치킨을 골랐다. 잠시 후 노릇노릇 튀겨진 가슴살과 닭다리가 나왔다. 아이들은 치킨을 보고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진짜 먹어도 되냐는 듯이. 나는 얼른 먹으라고 했고 아이들은 꼬질꼬질한 손으로 닭다리를 집어 케첩에 찍어먹었다. 아이들의 이름은 조셉과 지악이었다. Kfc 안에는 이들 또래가 많았다. 각자 부모님과 함께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외국인이 Homeless인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으니 들어올 때부터 따라왔던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됐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궁금했나 보다. 아이들은 영어를 못했다. 대충 눈짓 발짓으로 대화했다.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지악이 오늘 번 돈은 200원이었다. 나는 그걸 밥값으로 달라고 했다. 아이는 망설였다. 안 줄 거야? 아이는 고민했지만 밥을 얻어먹었으니 줘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꼬깃꼬깃 구겨져있는 200원을 내 손에 쥐어줬다. 웃음이 났다. 다시 돈을 돌려주며 괜찮다고 했다. 장난이었다고. 조셉과 지악은 따라 웃었다. 아이들은 12살, 13살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주 토요일이 되면 아이들을 만났다. 난지리에 가서 진료도 못하니 남는 시간에 아이들 맛있는 거나 사주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많은 아이들이 보였다. 조셉과 지악 두 명의 아이들을 kfc로 데려갈 때면 멀리서 이 아이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모른 척했다. 모든 아이들을 감당할 순 없었다. 그러나 그다음 주가 됐을 땐 조셉과 지악 옆으로 다른 아이들이 삐쭉거리며 서있었다. 아이들은 눈빛으로 공격했다. 나는 그 공격을 감당할 내공이 부족했다. 결국 삐쭉거리며 서 있던 아이들 6명을 데리고 kfc로 들어갔다. 우르르 몰려들어가니 사람들이 또 쳐다봤다. 이제 그런 시선에는 익숙했다.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한 두 명씩 손을 씻고 오게 했다. 비누를 묻혀 깨끗이 씻고 오라고 일러줬다. 남자아이들이 손을 씻을 땐 땟국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이 아렸다.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아이들은 얼굴에도, 손과 다리에도 거뭇거뭇한 때가 가득했다. 


손을 깨끗이 씻기고 자리에 앉았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물었다. 아이들은 쭈뼛거렸지만 옆에 친구들이 있으니 크게 낯설어하지 않았다. 치킨을 버켓으로 시켰다. 명당 두 개씩 나눠주니 소리를 지른다. 아이들 중 누구도 kfc를 와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치킨을 먹고 나면 다시 물통을 주웠고, 팔러 다녔다. 추운 날이면 길거리 풀 숲에서 모닥불을 피워 그 옆에서 잠을 잤고, 9살인 아이가 2살짜리 아이를 업어 키우기도 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은 서로 똘똘 뭉쳤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했다. 세상 사람 누구도 이 아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 땅에서 그렇게 하기엔 그 수가 너무나 많았다. 별 것 아니지만 나라도 이곳에 있는 동안 아이들에게 치킨을 사주자고 생각했다. 매주 토요일을 기대 가득한 날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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