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처럼 굴다간 노비 된다.
같은 팀에 사투리가 심한 차장급 상사 한 명이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하이톤 발성과 목 돌아가듯 빡빡 꺾이는 억양을 가졌다.
그가 앉은자리에서 반경 10m 까지는 또렷하게 소리가 전달된다.
이 사람은 생존본능 스킬이 만렙이다. 절대 굴하지 않는 존버 정신에 같이 일하는 임원급 상사만 바라보는 해바라기형이다.
팀장이 어리버리하거나 빈틈이 보이면 적당히 패싱 하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
상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라도 피로 가면 바로 따라 나간다.
일하는 세련미는 부족하지만, 들이대기는 최고다.
어떻게든 상무 눈에 띄려고 악착같이 발버둥 친다.
그 나이대에 맞게 컴퓨터 문서 작업에 서툴다.
그런데 누가 봐도 허접한 기획서를 들고 팀장을 건너 띄고 상무에게 가서 보고한다.
상무는 당혹스럽다. 그 직급에 맞는 보고서 수준이 아니라 실망스럽다.
그런데 그는 굴하지 않는다.
계속 수정하고 계속 들이밀면서 어필한다.
깔끔하게 작성하고 그럴싸한 기획서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에 관심 없다.
그냥 상무와 접점 늘리는데 모든 에너지를 쓴다.
상무와 나이 차이가 한 살인지 동갑인지 그랬다.
상무는 그래도 스마트한 편이다. 과한 자기애와 승리감에 도취해 있어서 부하직원과 공감 능력은 부족했다.
항상 도파민이 과다 분비 된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상무는 계속 들이미는 차장급 직원에게 계속 조언을 한다.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눈 빛이 초롱초롱 오직 상무에게 향한다.
상무에게 일 못한다고 혼나도 좋다. 그냥 그런 피드백 무시하고 일단 상무한테 들이댄다.
상무는 귀찮게 하는 부하직원이 피곤하다.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조언도 해준다.
그러면 차장은 신이 난다. 그분의 눈에 들었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표정에 드러난다.
보고서나 기획서를 적당히 쓰지만 눈에 안 띄는 사람보단,
잘 못 쓰고 서툴지만 얼굴에 철판 깔고 계속 들이미는 사람이 결국 상사의 마음을 얻는다.
그 들이미는 과정 속에 "나는 당신만의 종입니다, 절 가르쳐주세요"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심어준다.
팀장을 패싱하고 상무에게 곧장 달려가는 막무가내 정신을 배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는 혼란스럽다.
그렇게 그는 그 자리까지 올라왔다.
회의 시간에 팀원 모두가 모여 공동 업무를 추진하다 보면 서로 언쟁을 벌인다.
그의 막무가내 정신은 회의시간에도 진가를 발휘한다.
독특한 지방 사투리와 하이톤으로 상대를 누른다.
그 칼랑하면서 물결치는 목소리를 들으면 듣는 사람은 금방 뒷골이 땅긴다.
그리고 스트레스받는다.
정말 듣기 싫다.
그런데 그게 또 먹힌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사투리로 부하직원을 혼내기라도 하면, 혼난 직원은 그 길로 퇴사하고 싶은 심정이다.
들이미는 정신력만 뒷받침되면 세상 못할 게 없다.
특히 상무가 관심 갖는 일이나 주제에 관해서는 미친 듯이 달려든다.
혹시나 그것과 관련한 일을 누군가 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숟가락을 얹거나 뺏으려 한다.
이때부터 소위 선 넘기, 영역 침범이 시작된다.
본인 분야가 아님에도 슬그머니 본인영역으로 끌어당긴다.
본인보다 부하직원이 그것을 맡으면 바로 뺏는다.
아니면 엉성한 기획서를 들고 가서 미리 보고를 해버린다.
윗 상사도 잘 안다. 그런데 내심 좋아한다. 일은 못해도 열심히 하려는 사람 누가 싫겠냐.
소위 업무의 주도권을 누군가 쥐기 시작하면 거기에 누군가는 끌려가기 마련이다.
중요하고 돋보이는 일을 서로 독차지하려고 신경전을 펼친다.
여기에 끼지 못하거나 선비같은 부하직원은 그냥 당하기만 한다.
그래서 고과 시즌에 무얼 했냐고 써내라고 하면 쓸 내용이 없다.
그렇게 선 넘기를 밥 먹듯이 해야 고과도 챙겨 가더라.
그리고 앞에선 웃으면서 괜히 사람 챙겨주는 척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업무 당사자와 협의 없이
그냥 상무에게 보고를 해버린다.
말 그대로 매너도 없고 배려도 없는 진상이다.
그런데 그런 류의 사람이 나만 겪으라는 법이 없다.
항상 어디에든 비슷한 상황이 있고 비슷한 사람이 있다.
대처법은 잘 모르겠다. 그저 스트레스 덜 받는 수밖에 없다.
혹시나 그렇게 당하고만 있다면, 힘내시라.
언젠가 그런 사람도 떠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