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드 <라이언의 은신처>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실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뒤로….
"초급자가 보기에 쉽고 괜찮은 일드가 있대요.
넷플릭스에 올라와있다고 하니, 권상도 시간 되면 한번 보세요~!"
일본어 선생님께서 어느 날 중급반 학생이 추천해 준 드라마라며 <라이언의 은신처>라는 작품을 소개해 주었다. 이내 그것이 일본 관련 알고리즘으로 얽혀있는 많은 작품 안에서 계속 나 좀 봐달라고 상위에 떠 있던 드라마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예고편만 봤을 때 딱히 끌리는 작품은 아니었는데, 초보자에게 과연 어느 정도 들릴까 하는 호기심에 일과를 마친 어느 늦은 밤 1화 재생 버튼을 눌렀다.
드라마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슴푸레한 저녁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여인과 아이가 숲속 어느 다리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시작한 드라마의 첫 장면에 서스펜스, 공포, 스릴러가 다 등장해 버려 '이거 괜히 시작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곧 평범한 일본 가정집으로 장면이 전환되고, 평온해 보이는 두 형제의 일상이 나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내심 대체 언제쯤 아는 일본어가 나올까 기다리며 한 화 두 화 시청하다 보니 어느샌가 작품에 스며들게 되었다. 다행히 드라마는 스릴러 쪽보다는 따뜻한 휴먼 드라마에 가까웠고, 꽤나 내 취향이었다.
드라마는 총 11부작으로, 일본 TBS에서 방영 중에 넷플릭스에 동시에 올라왔기 때문에 지상파 드라마처럼 매주 기다리는 재미가 있었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성실하고 다정한 주인공 히로토는 부모를 잃고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남동생 미치토와 둘이 살고 있다. 히로토는 시청에서 근무하는 청년이고, 미치토는 '라이언'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나름대로 평온한 인생을 살고 있던 그들에게 수수께끼 소년 '라이언'이 나타나면서 반복되던 삶의 패턴이 무너지게 되고,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형 히로토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찾아 나아가게 되고 동생 미치토도 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립하는 연습을 하게 된다.
음…. 한마디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 서스펜스 휴먼 드라마라고 볼 수 있겠다.
초보자 입장에서 일본어가 술술 들리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미치토의 대사들이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미치토의 대사만큼은 잘 들렸던 것 같다. 이 점이 중급반 학생이 이 드라마를 추천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드라마 중간중간 괭이갈매기가 꾸준히 등장한다.
라이언만 주로 그리던 동생이 라이언 옆에 함께 그린 괭이갈매기, 각자의 결심을 이야기할 때, 서로의 출발을 응원할 때 멀리서 들려오는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 등…. 괭이갈매기는 라이언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괭이갈매기가 등장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다.
1화 초반 평소처럼 정해진 요일에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형제가 하늘 위 괭이갈매기를 보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바다도 아닌데 괭이갈매기가 있다는 형의 말에 동생이 이렇게 답한다.
"바다가 아니어도 괭이갈매기는 괭이갈매기입니다.
어디로 날아갈지는 괭이갈매기의 자유입니다.
괭이갈매기도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동생의 삶의 패턴과 보폭에 맞춰 사느라 정작 자신이 뭘 원하고 사는지도 모른 채로 살아가던 형 히로토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들에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무 일 없이,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냐마는 이 대사는 마치 반복된 삶의 패턴에 맞춰 살며 자신이 뭘 원하고 사는지 모르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자유로운 괭이갈매기처럼 동생도, 형도 새로운 풍경을 찾아 떠나게 되는데 모든 갈등이 마무리되고 훈훈함만이 남은 마지막 회는 몇 번이고 돌려봐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히로토와 미치토가 각자의 영역에서 잘 살고 있을 것만 같다.
괭이갈매기의 이야기는 작가가 우리 모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새로운 풍경을 찾아서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고, 어디로 날아갈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라고.
어쨌든,
해피엔딩은 늘 옳다.
몇 주 후 일본어 수업 시간에 <라이언의 은신처>로 섀도잉 수업을 진행했다.
음, 역시 <아기 돼지 삼 형제>보다 더 재미있었다.
JLPT(일본어능력시험)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