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과 김밥 말기
둘째날, 나나세상, 쿠미상과 아침 9시에 김밥 만들기를 하자고 했다.
부랴부랴 눈곱을 떼고 나와 씻고 압력밥솥에 쌀을 앉히고 나니, 이미 곱게 화장을 하고 외출복으로 환복까지 마친 쿠미상과 나나세상이 아이들 방에서 나온다. 낯선 나라에서 호텔도 아닌 가정집의 아이들 방에서 잠을 청하려니 불편했을 법도 한데, 밝게 인사해주는 나나세상과 쿠미상이 너무 이쁘고 고마웠다.
서둘러 김밥 재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트레이더스에서 한국 과자도 사고, 남한산성에도 갈 예정이라 마음이 조금 바빴다.
지금 물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야채 김밥 한줄이 1000원 하던 대학생 시절, 1년 정도 <김밥 천국>에서 주말 알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알바 할때 김밥 천국에 있었던 김밥의 종류는 <야채 김밥, 참치 김밥, 소고기 김밥, 계란 김밥, 모둠 김밥, 샐러리 김밥>이다. 어느 것 하나 맛없는 김밥이 없었으나, 그 시절 나의 최애 김밥은 샐러리에 마요네즈를 뿌린 샐러리 김밥이었다. 그때까진 별로 접해본 적도 맛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던 샐러리가 김밥과 은근 잘 어울리는 재료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요즘엔 김밥 안에 제육, 돈까스 같은 든든한 재료들을 넣기도 하고, 계란과 당근을 얇게 썰어 잔뜩 넣은 키토 김밥도 유행이다. 내가 잘 만드는 김밥은 요즘 유행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 잠깐의 알바 덕분에 소풍 날 엄마가 싸주셨던 집에서 만든 추억의 김밥은 나름 자신이 있다.
당근, 맛살, 햄을 기름에 달달 볶고. 계란 지단을 부친다. 오늘은 참치 김밥도 따로 만들 예정이라, 참치와 마요네즈를 버무린 것도 따로 준비한다. 고슬고슬 지은 밥에 참기름과 맛소금, 깨를 넣어 섞어주면 모든 재료 준비가 끝난다.
어제 나나세상과 쿠미상에게 혹시 못먹는 한국음식이 있냐고 물었다.
그녀들은 부랴부랴 검색을 해서 '깻잎 장아찌'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아마 한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왔던 것 같은데, 향도 양념도 모두 낯설었으리라. 뭐든 괜찮다고 하는 그녀들이 이렇게 손수 찾아서 보여줄 정도면 정말 별로였나보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다만, 이대로 깻잎에 대한 안좋은 감정을 가진 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깻잎이 다른 재료와 조화롭게 섞이면 얼마든지 맛있는 야채라는 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에, 오늘 김밥에서 깻잎을 빼지 않았다. 물론 오늘의 김밥 재료에 그 문제의 '깻잎'이 들어갈 예정인데 괜찮겠냐고 그녀들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들은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중간중간 사진도 찍어가며 반짝반짝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게 뭐라고 사진 찍을 일인가 부끄러웠지만.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일본의 가정집에서 오니기리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었다면 신기하긴 마찬가지였을 거다.
먼저 김 위에 밥을 2/3정도 깔고, 재료들을 가운데 하나씩 올린 다음 돌돌 말아준다. 그냥 훅 김밥을 말아버리는 나에게 나나세상이 '김밥말'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것은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역시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녀다. 내가 한번 시범을 보인 뒤 나나세상 쿠미상이 번갈아가며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나보다도 더 이쁘게 김밥을 잘 말았다. 오히려 내가 처음에 시범을 보였던 김밥은 의욕과다로 옆구리가 터져버리는 불상사가 생겼는데, 그녀들은 터진 김밥 하나 없이 예쁘게도 말았다.
김밥도 이쁘고, 직접 만 김밥 하나를 들고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어주는 그녀들도 이쁘다.
아, 그리고 깻잎이 들어간 김밥은 정말 맛있다고 해주었다.
깻잎에 악감정을 품고 돌아가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