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본인 게스트와 함께한 동네 한 바퀴

산책로에서 만난 설빙

by 권냥이




일본인 게스트와 함께한 동네 한 바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 남편이 정리를 할 동안 아이들과 나나세상, 쿠미상은 함께 티브이를 감상했다.

아이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한참 찾다가, 넷플릭스에서 고독한 미식가의 마츠시케 유타카와 성시경이 함께 맛집 탐방을 하는 <미친 맛집>을 선택해서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함께 들려온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저녁 식사 뒷정리를 마치고, 그녀들이 올 때 바리바리 싸 왔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가방에서 화수분처럼 기념품이 쏟아진다.

후쿠오카 명란이 그려진 짭조름한 과자 상자, 후지산이 그려진 일본 느낌 물씬 풍기는 부채, 나무로 만든 일본식 젓가락, 초등학생 남자아이를 위한 포켓몬 파우치 등등….일면식도 없던 한국의 호스트를 위해 일본에서부터 하나하나 준비해 왔다니 더욱더 감동이었다.

나는 첫째 아이가 작년에 몇 달간 연습했던 곡, 요네즈 켄시의 <레몬>을 일본인들을 위해 연주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이미 다 잊어버렸다며 아이는 한사코 거절했다.

대신 요즘 연주회를 준비하며 연습 중인 피아노곡 하나를 들려주었다.


일본인들이 오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은 함께 동네를 산책하는 것이었다.

관광지가 아닌 주거지의 일상, 작고 소박한 가게들, 시끌벅적한 식당과 술집의 소음, 평범한 여름 저녁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과 디저트를 찾아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디저트 가게 설빙이었다.

일본은 빙수가 우리처럼 다양하지가 않다.

딸기빙수는 딸기시럽이 뿌려져 있고. 멜론 빙수는 멜론 시럽이 뿌려져 있다고 한다.

다양한 토핑이 잔뜩 올라간 설빙을 꼭 맛보게 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녀들도 설빙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며

흔쾌히 따라나섰다.

이미 시간은 8시를 향해가고 있었기에 여름밤임에도 주변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8월의 습한 공기가 얼굴을 훅 감쌌다.

순간 괜히 외출을 제안했나 싶어 미안했는데, 그녀들이 먼저 일본은 지금도 40도이고, 한국은 오히려 시원한 편이라며 웃어 주었다.


나나세상은 영어 선생님이기에 영어로 의사소통이 전혀 무리가 없었으나 내가 무리가 있었기에 영어보다는 일본어로 자꾸 이야기했다. 처음엔 그녀는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영어로 물은 질문에 자꾸 일본어로 답하니 그녀도 나중엔 체념한 듯 보였다. 머쓱해진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나세상과 영어로 이야기하라고 부추겼는데, 그나마 쑥스러움이 덜한 첫째가 나나세상과 스몰토크를 해주었다.


반면 쿠미상은 한국어를 잘했다. 왜 그렇게 잘하냐고 하니 남자 아이돌 NCT의 팬인데, 코로나 시절 갈 곳도 없고 할 게 없어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코로나를 겪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땐 집에서 술 마신 기억밖에 없는데….나는 일본어, 나나세상은 영어, 쿠미상은 한국어로ㅡ 대화는 묘하게 흘러갔다.

그러다 결국 쿠미상이 우리와 한국어로 대화하고 나나세상에게 일본어로 통역을 해주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녀는 "인생 잡채에요!" "대박~!" 같은 요즘 말도 잘 썼다. (역시 덕질로 배운 외국어는 실전에 강하다)

일본어를 써보고 싶어서 만든 자리인데 대화 패턴이 어쩌다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어쨌든 머릿속에 있는 일본어는 다 내뱉어본 것 같다. 외국어는 기세다.


설빙에 도착해 망고 빙수와 오레오 빙수를 주문했다.

뭐든 새로운 것을 보면 그녀들은 "스고이~" 하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뭐든 즐겁고 새롭게 보이는 그 감정을 너무 잘 알 것 같기에 뭐가 나오면 무조건 포토타임을 먼저 주었다. 소식가 그녀들도 설빙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분명 돼지갈비찜에 잡채, 육회, 김치전을 먹고 온 직후인데, 한 숟갈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는 모습에 내심 흐뭇해하며 설빙에 데려간 나를 셀프 칭찬했다. 디저트로 배를 채우고, 20대 일본 여성의 니즈에 맞춰 다이소나 올리브영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왠지 그녀들은 쇼핑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일 명동에서 쇼핑할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기에 당장은 짐을 늘리지 않으려는 듯했다. 일본에 가면 돈키호테를 쓸어 담아오다시피 하는 나이기에 그녀들도 당연히 쇼핑을 원할 거라는 나의 짧은 생각이었다.


천을 낀 산책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앞서가던 그녀들이 현수막 앞에 멈춰서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현수막에 쓰인 문구는 <오소리 출몰 주의>.

우리 동네에 오소리 출몰 목격담이 심심치 않게 들려올 때였다.

쿠미상은 오소리 사진을 보며 자기네 동네에도 오소리가 많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본인의 고향이 너무 시골이라 볼 것이 별로 없다고 재차 강조하며 겸손해했지만, 그녀의 고향은 무려 후지산이 있고, 일본의 대표 와인 생산지로 와이너리가 유명한 아름다운 시골 마을 야마나시현이다. 친척분이 와이너리를 운영하신다고 야마나시현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안내를 해주겠다고 해주었다.

무엇보다 첫째 아이가 피아노 연주를 할 때 지나가는 말로 쿠미상이 했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우리집에도 그랜드피아노가 있는데, 잘 치지 않아요. "

사실, 그녀의 집(크기)이 몹시도 궁금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나세상, 쿠미상과 함께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과 일본의 사교육, 야구, 연예인, 드라마, 여행 이야기….

우리들은 밤 늦도록 서로의 나라에 관해 이야기했고, 서로를 이해했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서로의 일상을 기꺼이 나누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다정하고도 놀라웠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내일 아침 9시에 김밥 만들기 체험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keyword
이전 24화인생 잡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