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 없이 마주친 순간, 다시 시작될 줄 몰랐어
신림역 7번 출구.
거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계단 아래로 숨은 듯 자리한 칵테일 바,
디오니소스가 있다.
오래된 간판,
약간 미끄러운 철제 계단,
그리고
문을 열면 퍼지는
바닐라 시럽 냄새.
그곳은 우리에게
좋은 기억만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굳이 발길을 옮기지 않으려 했던 곳인데…
나는,
오늘 어쩐지
그 문을 다시 열고 말았다.
—
조명이 어두운 내부,
익숙한 잔들의 윤곽,
작게 흐르는 재즈.
그리고—
바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
준식이었다.
나는 순간 멈춰 섰다.
그도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몇 초간,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눈빛만 교차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많은 말이 오간 듯한 정적.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주 오나 봐?”
“아니. 그냥… 생각이 나서.”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다가가자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앉을래?”
나는 숨을 고르고
그의 옆에 앉았다.
—
잔이 두 개 놓였다.
둘 다 예전처럼 진한 컬러의 칵테일이었다.
“이건 네가 좋아하던 거.”
“기억하고 있었네.”
준식이 잔을 들었다.
나도 따라 들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그럭저럭. 일이 많고, 잠은 줄고.”
“나도 그래.”
둘 다 시선을 잔에 둔 채,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그가 물었다.
“그 노트는… 잘 버렸어?”
나는 그를 봤다.
그 눈빛은
예전보다 조금 더 깊었고,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응. 그냥,
버린 게 아니라…
정리했어.”
그는 잔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나 아직도
그 말 믿고 싶어.
'매니저는 다시 해줄 수 있으니까'
그 말.”
나는 웃었다.
슬픈 미소였지만,
어쩌면 오래간만에
가장 내 마음 같은 웃음이었다.
“…다시 해도 돼.
다시 해주고 싶어.
지금부터라도.”
그 순간,
디오니소스 안의 소음이
모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시,
이곳에서
우리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