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고 처음으로 정리를 시작했어
문이 닫히고
소리가 멎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술기운 때문일까.
심장이 둔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또렷하게 아팠다.
준식이 떠난 자리엔
열려 있는 노트가 놓여 있었다.
한 장, 두 장,
그는 몇 페이지를 넘긴 걸까.
그 안엔,
내가 제일 숨기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숨기고 싶었지만
지워지지 않아서 묻어둔 시간들이었다.
대희와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몸이 먼저였고,
감정은 나중이었다.
늘 그 순서였고,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더 상처였고,
그래서 더 잔재가 오래 남았다.
나는 준식에게
그 흔적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감정은 맑았고,
처음부터 어릴 적 기억처럼 따뜻했으니까.
나는 그런 내 과거가
그를 더럽히는 것 같아서
말할 수 없었다.
그게, 결국
더 큰 상처가 됐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
사흘이 지났다.
그는 연락이 없었다.
카톡 알림이 울릴 때마다
괜히 기대했다.
"어떻게든 연락하겠지."
"진짜 끝내자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날들이
하루, 이틀, 셋.
내가 더 이상
혼자만의 위로로는
버틸 수 없는 시점에 다다랐다.
노트를 다시 꺼냈다.
준식이 봤던 바로 그 페이지를
나도 다시 펼쳤다.
대희 보고 싶다.
그 체온이 그립다.
준식이에게 미안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나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그랬던 마음,
이제는 그만 보내기로 한다.
준식이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나,
너를 만나고 처음으로과거를 정리하고 싶어졌어.
나는 그 노트를 찢어
작은 상자에 넣었다.
테이프로 단단히 봉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상자를 내 품에서 밀어냈다.
텅—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너에게 가고 싶은데,
갈 수 있을까.
그날,
내 방 문이 닫히던 그 장면이
계속 꿈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준식아,
네가 아직 내 얘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나 이제, 다 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