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꽃잎 서너 개가 매서운 섬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2월이었다. 나의 ENFP가 매화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섬에서의 직장생활 첫 해는 유령의 집 같았다. 수시로 깜짝 놀랄 무엇이 튀어나왔다. 아이들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동들을 일삼았고 매일매일 터지는 다채로운 사건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아이들 덕분에(?) 내 상상력과 창의력은 연일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날았다. '설마' 했던 많은 사건들이 '역시'로 귀결되었다.
나의 '작용'과 아이들의 '반작용'이 팽팽하게 세력 균형을 유지하던 1학기 동안 어떡하면 아이들과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승리할까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연일 수능시험을 하루 앞둔 수험생의 마음처럼 극한의 긴장감에 파묻혀 있었다. 아이들이 간밤에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촉각을 곤두세우는 아침이 지속되었다. 극한의 긴장감은 극도의 피로감으로 바뀌어 서서히 나를 탈진하게 만들었다. 날이 더워질 무렵에는 드디어 나는 수족관의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의 전환점은 날씨가 선선해지고 나서야 찾아왔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직장생활의 달관의 경지를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6개월 만에 원로교사처럼 성숙해져 버린, 아니, 늙어버린 것이다.(풀버전이 궁금하시면 앞선 글 '나다움을 찾아준 섬마을 아이들'을 참고하세요.)
가을 무렵에 터진 '그 사건'은 달관의 경지를 맛본 나를 더욱 부처님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 사건'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섬 생활 3년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그 섬에서 구비문학(口碑文學)으로 전승된다는 말이 떠도는 '○○고개 집단행동 사건(나와 직장 동료들이 명명한 것이다.)'의 발단은 어처구니없게도 '사랑과 질투'였다.
풀 벌레가 시끄럽게 울고 모기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어느 가을날 저녁, 교무실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서에서 온 전화인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고개에서 오토바이 수 십 대를 세워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하필 교무실에 나와 학생부장 선생님밖에 없어서 둘이 부랴부랴 고개로 올라갔다. 30분 만에 고개에 도착해 보니 경찰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고 아이들은 두 패로 나뉘어 한창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겨우 아이들을 달래서 진정시켜 놓고 자초지종을 들었더니 중세 기사도 소설과 20세기 서부극을 합쳐 놓은 한 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아리따운 여인을 두고 총을 뽑는 서부의 카우보이 흉내를 그대로 내고 있었다. 한 여학생을 좋아하던 남학생 두 명(서로 선후배 관계다.)이 ○○고개에서 결투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날도 잘 잡아서 보름달이 휘황한 밤에. 아울러 서로의 친구들이 오토바이를 끌고 응원차 방문해서 분위기를 더욱 달구어 놓았다. 경찰과 합세하여 학교로 다 데리고 내려와서 복도에 죽 세워 놓으니 복도가 다 차 버렸다. 전교생 절반이 연루된 개교 이래 최대의 집단행동 사건이었다. 죽 엎드린 아이들로부터 반성문을 받고 있는데 기가 막힌 생각에 뒤이어 불가사의하게도 아이들의 무모한 행동이 이해가 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통해 나는 학교생활에 관해서는 더욱더 성숙(?)해졌다. 이제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져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2월이 되었다. 다시는 놀랄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나의 ENFP가 온 가족을 대동하고 운동장 끝 유일한 꽃나무 아래 서 있었다. 작년 이맘때의 나처럼 새로 시작될 직장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긴장감을 품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나의 ENFP를 처음 봤을 때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리고 나의 ENFP가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잔잔한 물결이 더 큰 파도를 일으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