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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Dec 07. 2020

경조사를 정리했다.

- 인간관계 간소화 프로젝트 3

이전 직장 동료로부터 봄꽃 향기가 담뿍 담긴 청첩장을 받았다. 요즘 들어 부쩍 나를 찾아오는 청첩장이 많아졌다. 교회도 나가지 않는데 십일조가 꼬박꼬박 집행된다는 직장 선배의 자랑기 어린 푸념에 경멸 어린 실소를 보내기도 했었는데, 나도 그렇게 되나 싶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청첩장을 받으면 나는 우선 일정표에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를 메모해 두고 직접 참석해야 할지, 축의금만 부칠 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축의금의 액수를 정한다. 예전에는 액수 정하는 것이 참 난감하기도 했는데 김영란 님 덕분에 고민이 확 줄어들었다. 간혹 훅 불면 끊어질 듯한 거미줄 같은 연결고리로 엮인 사람이 보낸 청첩장도 있는데 이런 청첩장은 과감히 무시하기도 한다. 일처리의 일련의 과정은 라면을 끓이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순서도로 확고히 정착되어 있다.


이번에 결혼 소식을 알린 전 직장 동료는 순서도 상 축의금만 부치면 되는 경우에 속한다. 아주 소원하지는 않았으나 그리 친밀하지도 않은 동료, 비록 본인의 결혼이라고 해도 결혼식장에 참석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렇게 기계적인 분류 작업을 한 지 일주일 뒤에 순서도를 뒤틀어 버린 문자가 도착했다. 결혼 소식을 알린 분으로부터의 문자.

"○○○ 선생님, 잘 지내시는지요? 좋은 여자분을 만나서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꼭 참석하셔서 축하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당혹스러웠다. 이건 단체문자가 아니라 나를 표적으로 한 개별 문자 아닌가? 나에게 왜 이런 문자를 보냈을까 하는 의문은 이내 꼭 참석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쉽게 잠식당해 버렸다. 그래서 어색함을 무릅쓰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역시 예상했던 어색함보다 더 큰 어색함이 투명 외투처럼 내 몸을 감쌌다. 그 직장을 떠난 지 3년이나 지났기에 낯익은 하객이 거의 없었다. 결혼식장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은 신랑뿐이었기에 신랑에게 빨리 눈도장이나 찍고 가려고 했는데 마침 신랑이 신부 대기실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아 나는 결국 축의금을 내고 일면식도 없는 신랑 아버지에게 신랑의 전 직장 동료라고 구구절절이 내 신분을 밝힌 후에 서둘러 식장을 빠져나왔다. 가는 데 한 시간, 예식장에서 30분, 오는 데 한 시간, 도합 황금 같은 토요일 낮 두 시간 30분을 어색함에 파묻혀 보내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조사 문화는 불가해(不可解)하면서도 가해(可解)하다. 불가해한 부분은, 특히 내 연배에는, 경사(애사)의 당사자보다는 그 가족을 축하(조문) 하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내서 참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데 있다. 결혼식장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네야 하고 장례식장에서는 낯선 영정 앞에서 절을 두 번 해야 한다. 가해한 부분은 우리나라의 부조 문화가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생겼다는 점이다. 예전 품앗이 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이 부조 문화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치러 본 분이라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얼마나 많은 금전적 비용이 발생하는지 잘 알 것이다. 부조금이 없다면 이는 온전히 빚으로 남게 된다. 두 해 전 장례식을 치러 본 나는 이를 똑똑히 목격했다. 부조금 덕분에 우리 가족은 큰 출혈 없이 아버지를 보내 드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불가해한 부분을 해소하면서도 금전적인 어려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보니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결론에 금세 도달했다.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경사는 참석하되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는 부조로 대신한다. 결혼식에 참석해도 가능한 한 식사를 하지 않는다. 결혼식에 참석해서 축하해 주고 식사도 하는 것이 혼주에게는 심리적인 만족감을 줄 수는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부담감으로 다가 올 수도 있다. 직장 직속상관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해서 할 수 없이 식사까지 했는데 식사비가 무려 10만 원이었던 적이 있다. 5만 원을 축의금으로 내고 10만 원짜리 식사 대접을 받았으니 식사 내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미리 알았다면 식사를 하지 않았을 텐데 식사하고 가라는 상사의 진심 어린 표정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예식장 가는 일도 줄이고 식사도 거의 하지 않으니 휴일 시간의 여유도 생기고 혼주에게 덜 미안하기도 했다.


장례식 같은 애사의 경우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 손님은 방명록으로 기억하고, 장례식 손님은 얼굴로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결혼식 때는 당사자나 부모나 막걸리를 두 주전자 들이켠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진다. 아울러 행사 시간도 아주 짧다. 그러니 누가 오고 안 왔는지 기억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장례식 때는 마음이 매우 차분해진다. 아울러 기간도 3일 정도로 길다. 자신을 위로해 주러 온 사람이 또렷이 기억이 나고 너무나도 고맙다. 그러니 장례식은 될 수 있으면 참석한다.


내가 경조사에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된 것은 주인과 손님 사이에 축하와 위로라는 진정성은 사라지고 채권자와 채무자라는 비인간적 변제 관계가 형성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부조를 했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부조를 하지 않을 경우 받을 돈을 떼인 것처럼 불쾌한 마음도 든다. 반대로 상대방이 부조를 하면 이를 꼼꼼히 기록했다가 다시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인간관계에 진한 기계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게 싫었다.


인생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는다면 나 역시 앞으로 두 번의 애사와 한 번의 경사를 마주쳐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행했던 친우(親友)로서의 도리는 당연함의 항아리 속에 담아 땅 속에 깊이 묻어 두고, 나의 결정권이 어느 정도 작동할 수 있는 우리 집안의 경조사는 가족들끼리 소박하게 치를 생각이다. 새로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된 아들의 연인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맞아줄 것이며 우리 곁을 떠나신 분과의 소중한 추억을 식구들끼리 되새기며 차분히 그분의 명복을 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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