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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j Oct 03. 2022

매일 집 앞을 쓰는 사람

우리의 호두나무

시골 외갓집으로 들어서는 작은 골목길에는 호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점처럼 흩어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낭만보다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시골집들을 이어주는 시멘트로 된 골목길의 거의 유일한 생명. 어떤 계절이 되면 거무죽죽한 것들이 떨어져 회색 길에 얼룩을 남기는데 어른들은 그게 호두라고 했다. 몇 살 인지도 기억 안 날 그때의 어린 나는 그렇게 호두가 나무에서 난다는 걸 알게 됐다.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병마와 싸우시고 돌아가신 후 일이 년쯤 됐을까. 다시 돌아간 시골집을 들어서려는데 골목이 휑한 것을 느꼈다. 소나무처럼 꼿꼿한 절개는 없어도, 벚꽃나무처럼 봄마다 사람 홀리는 눈을 나리지는 않아도 그 호두나무는 푸른 잎이었다가 때가 되면 호두를 뱉어내는 제 일을 착실히 하는 나무였는데 사람들의 미움을 사 이제는 그 기둥만 흉하게 남아 버렸다. 

잎과 열매가 자꾸 떨어져 차가 지나다니는데 방해가 되고 길이 더럽혀진다는 게 그 호두나무의 죄명이었다. 자연의 섭리를 성실히 따랐을 뿐인데 생명을 거두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평생 자신의 땅 밑을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 쓸었던 우리 할아버지라는 변호인을 잃었다는 게 호두나무가 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잃은 두 번째 까닭이었다. 

매일 오후 일정 시간이 되면 담장 너머로 땅을 쓸어내는 할아버지의 리드미컬한 빗자루 소리를 들었다고,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 비질 소리에 힘이 없어지더라는 앞집 시인 아주머니의 증언을 내게 전하던 엄마는 왈칵 울음을 쏟았다. 

할아버지는 성실한 농부셨다. 반주를 좋아하셔서 매일 점심이 되면 벌게진 얼굴에 까끌한 수염을 자랑하며 호탕하게 웃으셨던 할아버지는 그럼에도 때가 되면 나가서 밭을, 논을 일구고 호두나무 밑을 쓰셨으리라. 할아버지와 함께 점심을 먹고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조시는 걸 따라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언제 일어나셨는지도 모르는 새 들로 나가셨다했다. 

이제는 거기에 없는, 아니 밑동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그 자리를 본다. 그 밑을 쓸면서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상상해봤다. 추수 생각, 제사 때 사용할 음식 장 볼 생각, 날씨 생각,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의 고단함 들을 생각 하셨겠지. 거기에 내 생각도 조금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려봤다. 

땀 흘려 일해 자신의 인생을 가꾸어나가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셨던 할아버지께서 내가 '공부'만 하고 마침내 일하는 모습을 못 보고 돌아가셔서 아쉽다. 언제고 나는 땀을 흘려 연습실을 공연장을 뛰었지만 돈도 안 되는 그런 어떤 행동의 반복들이 할아버지 눈에 그것이 노동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을 터. 이제는 내가 결국에 이 일로 돈을 벌어 먹고 살고 있다고 전할 수가 없어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자들에게 소리 높여 말한다. 나도 이제 직업을 가졌다고, 나는 배우라는 노동자이자 예술가라고.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명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고 그러니 나도 곧 내 이름을 얻을 것이라고. 

집 앞 호두나무를 쓰는 일. 땀을 흘려 일하고, 그것이 모두와 나누어 쓰는 아무도 신경 써서 보지 않는 골목길이라 할지라도 내 공간을 가꾸는 일.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자 내가 추구하고 싶은 삶의 방향이라는 것을,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 내게 가르쳐주셨다. 

추석이 지났지만 아직 추수 때가 오지 않은 올해의 연둣빛 논을 바라보며 나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 다짐했다. 억만금을 벌지는 못해도 땀을 흘려 내 노동의 가치만큼의 돈을 벌고, 내 예술 세계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리고 그 사랑에 자만하지 않으며 내 집 앞을 들여다보고 매일 가꿀 줄 아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호두나무는 밑동이 잘려나가 죽었지만 이렇게 내게 생명의 말을 전한다. 너 자신의 호두나무 밑을 쓸며 살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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