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재래시장의 마지막 구역에 앉아있다. 굵은 황색의 날실이 섞인 어두우면서도 따뜻하고 편해 보이는 도톰한 직조 재킷에 양복바지 차림이다, 아무 말이 없었다. 복장만으로도 눈에 띄는데 그 앞에 놓인 것은 오래되어 터질 듯 형태가 잡힌 넓은 광주리에 쌓인 후추였다, 그 광주리는 굵고 부드러운 재질로 땋아 만들어졌고 실이 해지지는 않았지만 검은 때 묻은 것이 2대 할머니에게 물려받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재래시장에서 자주보이는, 무엇이 담겨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물건이다 새삼 재료가 궁금한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박스 날개를 잘라서 써 놓은 '후추' 그의 팝업스토어에 짧게 쓰인 안내문. 몇 번을 지나며 보았는데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후추라, 그는 동네 물정 모르는 이국에서 온 무역상사 부장님처럼 엉뚱하게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라도 온 것일까. 후추, 좋지. 우리도 집에서 소금 다음으로 많이 쓰는 향신료니까. 파스타에 조림에 국에 볶음에, 참 후추만 끓인 차도 맛이 좋다. 후추 종류가 굉장히 많다고 하는데 보통 우리가 후추라고 하면 흑후추고 백후추는 독특하게 다른 맛이 있었는데 먹어 본 지 오래라 구분해서 적으려니 어렵다. 예전에는 주로 직사각 깡통에 담긴 갈아진 후추를 썼는데 설에 윤여사님은 특별히 시장에서 후추를 갈아오곤 했다. 막 간 원두같이 봉투를 열면 신선한 향이 집안을 감도는 순간을, 좋아했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것을 사 왔나 싶었지. 이런 곳이었을까. 많은 친지들이 앉아있는 이 상 저 상 대접 가득 담은 떡국에 고명으로 미리 찢어놓은 고기를 올리고 마지막으로 티스푼으로 후추를 살살 뿌려서 쟁반에 담아 옮겼다. 우리는 언제부터 떡국에 후추를 뿌려 먹은 걸까. 후추는 모두 수입한다고 하는데 다른 향신료는 몰라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후추를 뿌리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대단하다고 할 밖에.
“후추 살까?”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
지금은 그라인더 달린 후추병을 쉽게 마트에서 살 수 있으니까, 후춧가루를 잘 사지는 않는데 식당에서 육개장 먹을 때는 꼭 그 후춧가루를 뿌려서 먹는다. 식탁에 놓인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는 아니다. 걸죽한 국물에 섞여 은근하게 퍼지면서 맛이 사는 것 같다고 할까. 꼭 사려고 하면 없다, 딱 후추가 떨어졌기 때문에 사장님을 찾아 나선 우리는 길에 지붕을 씌우는, 재래시장의 현대화라고 불뤼는 아케이드 공사기간과 맞물려서 비어진 가게들과 마주해야 했고 그렇게 잊고 있던 어느 날, 사장님이 작전을 바꿨는지 시장의 초입에 다시금 후추팝업스토어가 열렸다.
그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후추는 많이 팔렸을까. 집에 후추가 남아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후추 주세요!”
“얼마나 드릴까요?”
우리는 가장 작은 단위 한 홉을 사서 집으로 왔다. 큰 기대는 아니어서 사 온 그대로 원래 쓰던 것을 다 쓸 때까지 보관했다가 빈 병에 채워 넣고 수동으로 그라인더 작동을 시작했다. 작고 도톰한 실린더 형의 유리병을 뒤집어서 한 손에 쥐고 입구에 윗돌을 다른 손으로 쥐고 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드-득 재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드-득 그 안의 날들이 물리며 힘을 받아서 알갱이를 부수고 신석기 조상님들도 이렇게 갈판과 갈돌을 움직이며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랏, 좋은 향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신선하다. 통으로 넣어보자. 오호, 맛이 좋은데, 너무 맵지 않고 먹을 만 해. 여기도 넣고 저기도 넣고 그렇게 통 안의 후추는 줄어들고 기다리는 장은 열리지 않고, 기다리고 기다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