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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치 Feb 17. 2022

[홍콩이야기 7] 임밍아웃

언젠가부터 속이 좋지 않고 배고팠다가 막상 음식을 먹고 나면 다 게워내고 하기를 반복했다. 고통스러웠던 이전 직장에서의 생활 이후 얻어진 위병이 나를 이렇게도 오랫동안 괴롭히는구나 싶었다. 카베진이었던가. 원래도 위장이 예민해 신경 쓸 일이 있으면 항상 속이 탈이 나는 체질인지라 예전에 추천받아 한참을 꾸준하게 먹었던 약을 떠올리며 오늘 밖에 나가는 김에 그거 한 병 사 와야겠다 싶었다. “혹시 임신한 거 아니야?” 나일이 뜬금없이 물어본다. “임신은 무슨 임신” “너 생리도 제대로 안 했잖아.” “나 원래 스트레스받으면 생리 건너뛰고 그러기도 해. 안 그래도 생리할 때 지나서 계속 안 하고 있어서 몸이 찌뿌둥한 거 같아. 가슴 주위도 좀 아픈 거 같고.” 임신이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인지. 그런데 느낌이 약간 이상하긴 하다. 아니야, 그래도 생리 때 되서 약간 피가 비치듯 며칠 나오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종종 있는 일이다. 고 3 때는 1차 수시 합격(8월)이 나기 전까지 스트레스로 생리를 딱 3번만 했었던 적도 있었더랬다.


가슴 주위가 계속 아프고 토하는 횟수도 잦아지니 이제는 나일도 심각하게 걱정이다. 병 키우지 말고 병원에 가보라고 하며 출근을 했다. 뭐 이런 걸로 병원은 무슨. 한 번 병원에 가면 10만 원은 우습게 깨지는 곳이 홍콩이다. 이전에야 보험 빵빵한 은행에 다니니 병원비 생각 안 하고 조금만 아파도 가서 진단서 받고 하루씩 쉬기도 했지만 이제는 백수 아닌가! 갑자기 샴푸가 똑 떨어졌던 게 생각나 머리를 대충 빗고 마스크를 끼고 샴푸를 사러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매닝스(Manning’s)가 보인다. 샴푸부터 시작해 화장품, 기저귀, 약, 과자 등등 우리나라 올리브영 같은 곳이다. 뭐에라도 이끌리듯 매닝스 안으로 들어가 임신 테스트 앞에 섰다. 막상 이 앞에 서자니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종류는 또 왜 이렇게 다양한지. 적당한 가격의 테스트기를 두 개 샀다. 혹시 모르니 각각 다른 브랜드로.


병원 가기 전 날 두 개, 병원 가는 날 아침에 두 개.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던 나의 임신 테스트

겉에 적힌 설명서에는 시험지 부분에 잘 조준(?)을 해 소변을 적당히 묻히고 몇 분을 기다리라는데 뭐 기다릴 필요도 없이 5초 만에 양성 반응이 나온다. 이게 지금 맞는 건가 믿기지가 않았다. 이거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새 하얘졌다. 일단 나일한테 이 소식을 알려야 하는데 어떻게 알려야 하는 건지, 무턱대고 임신테스트기 사진을 찍어 나일에게 보냈다. 30초도 못 참고 전화를 걸었다. “나일, 지금 내가 보낸 사진 봤어?” “아니, 나 지금 방금 콜 끝났어? 뭔데?” “일단 봐봐.” 사진을 확인하는 그 시간이 억만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 “이거 확실한 거 맞아?” “응 테스트 이미 두 개나 했어.” 반대쪽에서 대꾸가 없다. 괜히 어색한 마음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오늘 바쁘다고 했지? 아무튼 있다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다시 이야기해.”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웠다.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는 내 배를 토닥토닥 감싸면서.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다니, 왠지 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기뻤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내가 꼭 널 지켜줄게.


띵똥, 왓츠앱 메시지 알람이 뜬다. ‘나 콜 다 취소했어.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무덤덤하게 받았던 전화가 무색하게 전화를 끊은 지 5분도 안 되어 온 메시지였다. 보통 때면 30분 정도 걸리는 길인데 택시를 타고 왔는지 15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키를 꽂는 소리가 나길래 얼른 나가 문을 여니 그는 나를 보자마자 감격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는 한참을 꼬옥 안아 주었다. “아까 옆에 보스가 있어서 티를 잘 못 냈어. 미안해, 서운했던 거 아니지? 나 지금 너무너무 기뻐.” 이런 사람이 아빠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약 없이 방문가능 한 우리 나라 병원 시스템과 달리 홍콩의 사립 병원들은 무조건 예약 진료만 받는다. 물론 공립 병원에 가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공립 병원은 사립 병원에 비해 시설이 떨어지기도 하고 또 거긴 예약 대기 시간이 어마어마한 지라 나 같은 경우는 항상 사립 병원을 이용하는 편이다. 병원에 도착했고, 병원은 내 생각보다 시설이 훨씬 좋았다. 물론 나중에 병원비 내역을 받고 그 이유를 알았지만서도.. 30여 분간의 진찰과 초음파 검사 이후 청구된 금액은 약 60만 원 정도. 이후 피검사 & 기형아 검사 등등을 한 병원비는 120만 원에 달했다(!!) 그 와중에 와 여기 무슨 호그와트 같다며 사진 찍어야겠다고 난리 치는 나를 나일이 어이없게 바라본다. 대기실에 앉아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자꾸 나일이 화장실에 간단다. “왜 자꾸 화장실 가? 물 많이 마셨어?” 라 물어보니 너무 긴장이 된단다. 도통 긴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놀랐다. 내 손을 건넸다. 맞잡은 그의 손도 차다. 그래도 약간의 온기가 느껴지니 안심이 된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 체온을 재고, 체중을 재고, 혈압을 잰다. 당 검사를 위해 소변도 통에 받아 건넸다. 한 10분이면 될 줄 알았던 검사였는데 벌써 30분이 지나간다. 여러 검사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그냥 이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지막 순번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선생님이 물어본다. “언제 임신인걸 알았나요?” “네? 저 임신 맞아요? 인터넷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고 하길래”라는 내 말에 선생님이 빙긋 웃는다. 내 마지막 생리의 첫 시작 날을 이야기하고, 그 간 혹시 몸의 변화가 있었는지 물어본다. 그러고 보니, 원래 하지도 않던 멀미를 했었고, 속이 계속 불편했으며, 어떤 때는 배가 너무 고파서 하루 종일 먹고 또 먹자마자 다 게워내기도 했었다고 대답을 했다. “아니 그런데 왜 임신을 의심 안 했어요?” “아 사실 제가 전 직장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퇴사를 했거든요. 그때 스트레스성 신경성 위염 & 장염이 심하게 와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종종 토를 하곤 했었어요. 그래서 전 그 이후로 제 소화기관이 타격을 입어서 아직 회복이 안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라는 말에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12월에 생리를 안 했는데 그때는 의심을 안 했나요?” “12월은 크리스마스며 NYE(New Year’s Eve)며 약속도 너무 많고 해서 잊고 있었어요. 생리 때쯤 약간 피가 비치듯 며칠 혈흔이 보이기도 했었고요” 산모에 따라 다르지만 꽤 많은 경우 착상 후 착상혈이 비친다고 한다. 그리고 난 전혀 몰랐던 사실인데, 임신 기간 내내 계속해서 분비물이 조금씩 나오며 (나 같은 경우는 갈색 혈흔을 띄었다) 임신 중기로 갈수록 더 많이 나온다고 한다. 당분간 생리 안 한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팬티라이너의 시대가 열렸다! “그럼 바로 초음파를 볼까요?” “지금요?” “네 저기 의자에 누워 보세요” 얼떨결에 초음파 의자에 누웠다.


아직 블루베리 크기였건 7주 쪼꼬미 시절의 우리 복덩이!

드라마에서 보면 “조금 차갑습니다~” 라며 배에 젤을 칙칙 뿌리던데 배에 젤을 발랐는지도 모르게 바로 시작이 된다. 나중에 본 건데 선생님이 젤을 손에 발라 (장갑을 끼고 계셨다) 본인 체온으로 따뜻하게 비비신 후 내 배에도 바르고 초음파 기계에도 바르셨더라. 눈앞 천장에 비스듬히 달려 있는 커다란 화면에 티브이에서 보던 검정 화면이 나타난다. 도대체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다. 내 자궁이 약간 뒤에 위치하고 있다는 거 같다며 기계를 내 배에 누르신다. “저기 보이나요?” 강낭콩 같이 생긴 아이를 가리키신다.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안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이렇게 보기 어렵겠다며 내 질 안으로 기계를 넣어 보자고 하신다. 매 6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으며 익숙해질 만하기도 한데 내시경은 여전히 무섭다. 바로 의자에서 발 받침대가 나오고 익숙하게 그 받침대에 발을 걸쳤다. “약간 불편할 거예요”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산부인과에서 불편하다는 말은 아플 거라는 뜻이다. 검진 때였더라면 선생님 이거 꼭 해야 되요? 했겠지만 아파도 참는다. 기계를 넣자 확실히 더 자세하고 선명하게 보인다. 강낭콩 안에 또 다른 작은 게 있었고 무슨 꼬리 같은 게 달려 있다. “수정이 잘 됐구요, 자궁에 잘 안착을 했네요 (your preganancy is settled and well positioned). 저기 꼬리 같이 보이는 건 탯줄이구요, 애기는 한 명이고요, 7주 정도 된 거 같네요. 길이를 좀 재 볼까요? 0.8cm이고요, 주수에 비해서는 좀 작은 편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초기라 2주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고요, 4주 후에 오면 아마 팔다리도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현재로써 예상일은 8월 29일이네요.” 너무 많은 정보가 순식간에 들어와서 내가 뭘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수정이 잘 되었고 (well positioned) 8월 29일이 예정일이라는 것.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기뻤고 나일을 바라보자 그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초음파 의자에서 내려와 다시 선생님 책상 앞에 앉았다. 4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때는 피검사를 할 거라고 했다. 뭐라 뭐라 하며 검사 패키지를 줬는데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나중에 집에 가서 내준 팸플릿을 잘 읽어 봐야겠다 싶었다. 입덧은 언제 시작되냐는 질문에 “이미 시작한 거 같은데요?”라고 하셨고 “이게 입덧이에요? 드라마 보면 막 음식 냄새 맡고 웩웩하던데” 라 하자 사람마다 다르다는 뭐 짐작이 가는 말을 하셨다. 앞으로 입덧이 심해질 수도, 아니면 그냥 이렇게 지나갈 수도 있으며 사람에 따라 4주 후에 몸무게가 줄어서 오기도 하니 그런 거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 했다. 임산부가 먹어야 할 영양제를 처방해 주고 아직 아주 초기이니 일단 4주 후에 와서 아직 임신이 유지되고 있는지 먼저 확인을 하고, 확인이 되고 나면 그다음 피검사를 하자고 말씀하셨다. 나도 모르게 배를 꼭 쥐었다. 그때까지 꼭 잘 있어야 돼. 궁금한 게 있으면 지금

다 하라는 말에 안 그래도 집에서 적어 온 게 있다며 아이폰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Q1.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되냐요? 초밥 이런 거도 먹어도 돼요?

A1. 임산부는 아프면  먹는  곤란하니  것을 먹을 때는 신선도에 유의하고요, 먹을  있으면 먹고 싶은  아무거나 먹어요.


Q2. 운동해도 돼요?

A2. 그럼요. 어차피 지금 락다운 때문에 헬스장은   테니  조깅 같은  하려는 거죠? 너무 힘든 하이킹 같은 거 빼고 조깅, 걷기, 하고 싶은   하세요


Q3. 마사지받아도 돼요?

A3. 지금 마사지   곳 없지 않아요? 다음에  때까지  이럴 것 같으니  질문은 패스


Q4. 성관계는 해도 되나요?

A4. 해도 돼요. 다만 정액으로 인해 안 좋은 물질이 들어 올 수도 있으니 콘돔을 끼고 하거나, 아니면 질 안에는 사정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Q5. 가끔 갈색 혈흔이 묻어 나올 때가 있는 데 이거 괜찮은 건가요?

A5. 지금 몸 안에서 자궁이 크기를 늘려가고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배도 싸하게 아플 수 있어요. 임신 초기 증상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가슴과 유두 주변도 쓰라린다거나 통증이 좀 느껴질 수 있어요.


Q6. 저 임신한 거 모르고 저번 주에 코비드 백신 부스터 맞았는 데 괜찮나요? 이브루펜도 먹었는데..

A6. 이미 백신 맞았고 약도 먹었는데 지금 와서 바꿀 수 있는 게 있나요, 어차피 지금 연구 결과도 없고요. 오히려 미국 등지에서는 산모들이 백신 우선 접종군이기도 해요. 백신 접종 이후에도 애기가 잘 버텼고 지금도 자궁에서 잘 자라고 있어요. 그러니 그 생각은 하지 말고 앞으로 좋은 거 잘 먹고 튼튼히 키우도록 해요.


Q6. 그 외에 다른 것 주의할 것 있나요?

A6. 비흡연자라고 했죠? 이건 그럼 패스. 술은 마시나요? 술 같은 경우는 되도록 마시지 않는 게 좋아요 (참고로 외국에서는 일주일에 한 잔 와인 마시는 것 정도는 의사에 따라 허락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 이후 웬일로 술 생각도 나지 않아 병원 오기 전 날 와인 한 잔 마신 거 이외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더랬다). 몸이 아프거나 해서 병원 약을 처방받는다면 임신 사실을 꼭 알리도록 해요. (이것도 참고로 홍콩 병원에서는 20대 이후 여성에게는 항상 임신을 했는지, 임신 계획이 있는지 물어본다. 기억에 한국도 그랬던 듯!)


궁금했던 걸 물어보고 나와 살인적인 병원비를 내고, 그래도 이렇게 (그것도 내 나이에 ㅋㅋ), 자연임신이 된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다시 한 번 기뻐했다. 물론,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나일은 노산이 뭔가 싶었겠지만. 집에 택시를 타고 가자는 나일의 말에 조금 걷고 싶다고 했다. fresh air 가 필요했다. 걸어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는데 정작 나는 괜찮은데 옆에서 나일은 아주 조심하라고 난리다. 뭐 거의 집까지 엎고 갈 모양새다. 이런 사람이 아빠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나일과 만난 지 8개월, 이미 두 달여 됐을 때부터 이 사람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도 오고 갔더랬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누구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하지? 언제 이야기하지? 우리 지금 사는 집은 너무 작지 않아? 이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한껏 들뜬 이야기들을 이어 간다. 걸어가다 말고 갑자기 나일이 멈춰 서서 나를 꼭 안는다. “네가 임신을 해서 너무 기뻐” 나일 나이 올해 만 서른둘, 너 누나한테 완전 코 뀄다!!



[홍콩이야기 7] 임밍아웃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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