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딸 아이의 고백
집에서 잘 놀던 딸아이가 갑자기 내 품을 파고들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엉엉) 엄마 있잖아... 나 물건을 훔쳤어...예전에 제주도 갔을 때 있잖아. 땅에서 주웠다던 옥반지, 그거 사실 내가 몰래 가지고 나온거야. 너무 갖고 싶어서.그 때 사실대로 말했으면 됐을텐데 말하지 못해서... 나 너무 오랫동안 힘들었어....(엉엉)"
이게 무슨 일인가, 순간 멍했다.딸아이와 함께 제주도를 갔던 때라니,,,,돌이켜보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무려 3년 전이다.
3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머리를 빠르게 헤집어 보았다.명화로 도배된 미디어아트를 관람하고 놀라움과 감격에 휩싸여 나오던 길, 관광지가 으레 그렇듯 출구에 기념품샵이 있었다. 제주의 귤을 잔뜩 머금은듯한 오렌지빛 소품부터 각종 악세사리에 문구류까지 다양하고 독특한 기념품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가격이 가격인지라 눈요기만 하다 나왔더랬다.
출구에서 발걸음을 옮긴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딸아이가 외쳤다.
"어라? 이게 뭐지?"
"응? 뭐?"
딸아이가 바닥에서 반지를 주워 내게 보여주었는데, 옥반지같은 원석 반지가 2개 세트로 든 상품이었다.
(나) "오, 누가 흘렸나보다.
후후~ 이거 우리가 하면 되겠다~ 우리 하자~"
(딸) "그래도 돼?"
(나) "뭐 어때, 누가 흘린건데"
기념품샵과 출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충분히 가져다 줄 수도 있었음에도 나는 그저 꽁짜로 생긴 물건이 생겼다고 좋아하며 딸아이와 나눠 가져버렸다.
아이의 그릇된 행동과 나의 올바르지 못한 판단이 한 데 엮여 아이의 마음을 3년이나 옭아매어버리게 한 발단이 된 시점이었다.
내 품에 안겨 꺽꺽 울음을 삼키던 아이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며 말했다.
"그 때 그냥 내가 가져온거라고 말했으면 됐는데, 그때 솔직하지 못해서..... 그동안 너무 마음이 무거웠어.................."
"에구구, 그 오랫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엄마한테 사달라고 해보지....."
"엄마가 안사줄 것 같아서....... "
휴. 다시 떠올려보아도 반지의 디자인과 재질로 보아 내가 안 사줄 것이 틀림없던 반지였다.
정신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보니 어린시절의 내가 슬며시 떠올랐다. 나 또한 초등 6학년때 물건을 훔쳐서 집안이 난리난 적이 있었는데, 아이처럼 반지 하나를 살짝 훔친 것이 아니라 거의 절도 수준의 도둑질을 했었다.
내 어린 시절엔 지금의 아트박스와 같은 '선물의 집'이 꽤나 많았는데 어린 아이의 마음을 홀리기에 더할나위 없었다. 거사를 치를 즈음의 나는 명절 직후라 꽤나 돈도 많았는데 그저 꽁으로 물건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 값도 치르지않고 하나 둘 물건들을 쇼핑봉투에 하나씩 하나씩 쓸어담았다.
그런데, 초등 여자아이의 어설프고도 대담한 행각이 발각되지 않을리 있나. 수십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주인에게 불려가 대대적인 망신을 당했고 당장 부모에게 전화하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헌데 하필 그 날은 아빠의 대학 친구들이 부부동반으로 우리집에 내려와 흥겨운 잔치가 벌이고 있는 날이었다. 그 즐거운 시간에 부모님께 전화가 갔으니...................
몇년에 한번씩 만나는 동창들 앞에서 황당한 일을 겪어 정작 얼굴을 들지 못할 사람은 부모님인데, 정작 낯을 들지 못하는 이는 나였다. 학교 갈 엄두가 안나 등교를 못하고 있는 내 손을 꼭 부여잡고 아빠는 나를 학교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사방이 얼얼하게 느껴지던 그 날이 딸아이의 자백과 함께 30여년 만에 내게 펼쳐졌다.
딸아이에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이제라도 가게 주인에게 전화해서 사과하고 돈을 돌려드리자고 말을 건냈다. 그럼에도 오열을 그치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용감상'을 적어 건냈더니 드디어 고개를 들어 얼굴을 내어주었다.
돈을 돌려주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인기있는 관광명소이지만 기념품샵과는 계속해서 연결이 되지 않았고,
일주일만에 내 번호를 남기고 나서야 연결이 되었다. 기념품샵 매니저의 '이제라도 말해주어 고맙다'는 말과
나의 '변상할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내 마음 속은 깜깜한 동굴이었다. 나는 끝끝내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니저에게 아이가 물건을 훔쳤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이가 물건 값을 깜박하고 안 치르고 나왔다며 애둘러 말해버렸다. 내 어린시절의 절도 사건과 아이의 사건이 결부되며, 내 안에서 엄청난 수치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수치심과 죄스러움을 무릅쓰고 엄마에게 고백하여 용감상을 받은 아이처럼 나 또한 수치스러움을 딛고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일을 발판삼아 다음에는 꼭 수치스러움을 용기로 바꾸는 내가 되리라 굳게 마음 먹어본다. 수치스러워 입이 달싹 되더라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르더라도 용기를 내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