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오래 남은 건, 사람의 따뜻한 손길
폭염 속에서도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섬을 찾는다. 몇달 전 나는 통영 연화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수국의 섬이라는 수식어에 끌려서였지만, 정작 내게 오래 남은 건 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내가 발견한 건,
사람과 관계였다.
사실 나는 관계가 어렵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게 서툴고, 경계(boundary)를 지키는 법도 자주 흔들린다. 그러다 만난 책이 문요한 저자의 『관계를 읽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애정이나 노력만으로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고. 관계의 핵심은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며 거리를 조율하는 것, 즉 건강한 경계를 세우는 데 있다고.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마음 깊이 뜨끔했다. 내 바운더리는 허술했고, 침범당할 때마다 말하지 못한 채 상처만 키워왔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지켜내면서도
상대의 존엄을 존중하는 거리를 지키려 노력한다.
연화도에서 그 배움이 현실로 다가왔다.
혼자 산을 오르려니 덜컥 겁이 났다. 마침 앞서 걷는 아주머니 두 분이 있었지만, 모처럼 둘만의 여행일 텐데 괜히 방해될까 싶어 일정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그러나 정상에 다다르자 그분들이 먼저 말을 건넸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경계가 스르르 무너졌다. 잠시 후엔 가방에서 꺼낸 맥심 커피까지 내어주시는 게 아닌가. 노오란 맥심봉지에서 나온 커피 가루가 종이컵 속에서 뱅글뱅글 돌며 풀리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평소엔 잘 마시지 않는 인스턴트 커피였지만, 그 한 모금은 내가 가져온 아메리카노보다 훨씬 진하고 포근했다.
그 뒤로는 한 팀이 되어 걸었다. 내 폰 배터리가 나가자 사진도 함께 찍어주셨고, “여기 예쁜데 안 찍으세요?” 하며 뷰 포인트를 챙겨주셨다. 낯선 섬에서 낯선 이들과 자연스레 ‘우리’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순간은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섬에 혼자 갔다가 노부부께 과일을 얻어먹은 적이 있고, 다른 부부께 식혜를 나눔 받은 적도 있다. 섬에서는 늘 누군가가 건네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이 있다. 섬에 들어가면 그 말이 현실이 된다. 낯선 길 위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의 경계를 조율한다. 때로는 거리를 두고, 때로는 마음을 내어주며.
그 과정에서 나는 배운다.
건강한 바운더리는 벽이 아니라 다리라는 것을.
연화도의 수국보다 더 오래 남은 건,
두 아주머니가 내어준 달콤한 커피 한 모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