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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Jun 03. 2023

크로바레코드 22

22. 붕대클럽- J

    

다리 아래로 피신했지만, 그래도 강 건너에 햇살은 눈 부시다. 돗자리에 앉아 그와 함께 컵라면을 먹는다. 마론인형도 같이 앉혀놓고, 소꿉놀이처럼, 너 한입, 나 한입. 


“하니, 버킷리스트 중에, 절대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거 있어?”

국물을 한 모금 마신 그가, 잠깐 궁리한다.

“음, 날개 없이 하늘을 나는 거?”

“그게 뭐야?”

“비행기 말고, 풍선도 말고, 그냥 아무런 장비 없이 날아보는 거.”

“그건 투신 아니야?”

하니가 웃는다. 고개를 숙이고 웃는 그 모습이 너무 싱그럽다. 

“추락 말고, 붕, 하고 나는 거.”

아, 무술 영화에서 고수들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그건 정말 불가능한 꿈이네.

“제이는?”

“음, 할머니랑 통화하는 거? 통화해서 하니를 바꿔주고 싶어.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자랑하고 싶어.”

하니의 눈이 동그래진다. 뭐야, 더 귀엽게.  

“그건 언젠가 이룰 수 있겠네. 우리가 천국에 가는 날, 인사드리자.”

“응. 그러자.”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콩콩콩 달려간다. 아직은 뜨거운 햇살에 자꾸만 바닐라 맛이, 딸기 맛이 녹아내린다. 음, 이러다가 콘까지 눅눅해지겠다. 하니는 어딘가 놀란 표정. 막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순간, 붕 하고 몸이 떠올랐다. 그의 버킷리스트처럼 날개도 없이,      


“그만 일어나야지. 해가 중천이다.”

“할머니 5분만,”

“그 말만 세 번째야. 그러다 지각한다.”

웅, 하지만, 이불 밖은 너무 추운걸. 꼭 이글루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단 말이야. 결국 할머니의 성화에 이불 밖으로 벗어났다. 상 위엔 먹음직스런 계란프라이랑 아삭한 깍두기, 할머니가 막 퍼 담은 밥을 미역국에 말아주신다.

“어여 먹고 씻어.”

으, 씻는 건 더 싫은데. 눈꼽도 떼지 않고 밥을 먹는다. 음, 따뜻하고 맛있어. 

고양이 세수를 하고 양말을 끌어올린다. 내복에, 쫄바지, 항아리 같은 원피스에 꽃무늬 점퍼를 입는데, 벨이 울렸다. 할머니가 서둘러 나가신다. 

“네가 하니로구나.”

책가방을 멘 소년이 꾸벅 인사한다. 

“제이를 데리러 왔어요.”

“그래. 어서 데리고 가렴.”

하니와 손을 잡고 학교에 간다. 대문께에서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데도, 할머닌 춥지도 않나 봐. 맨날 입는 스웨터만 입고선, 웃기만 해. 


“제이야, 제이야”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찌른다. 여긴 어디지? 분명히 하니랑 학교에 갔었는데, 매직이랑, 몽이언니랑, 준이형, 루비언니, 블레싱도 모두 우릴 반겨줬는데, 다 어디 가고, 나만 남았어. 희고 뻣뻣한 시트가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엄마의 얼굴도 낯설다. 언제나 깔끔하고, 예뻤던 엄마가, 왜 이렇게 늙은 거야. 머리도 헝클어지고, 눈도 퉁퉁 부었고. 발도 맨발이야. 

“하니는?”

“죽다 살아나서, 하는 첫 마디가, 하니니? 너도 참,”

엄마가 어이 없어 하는 걸 보니, 하니는 무사한가보다.

“하니는 무사해. 왼쪽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다리?”

“그래, 넌 오른쪽 팔이 부러지고. 화단에 떨어졌으니 망정이니, 안 그랬으면, 죽었대.”

왜, 그 말을 하면서 울어요. 나도 찡하게. 한동안 훌쩍거리던 엄마가 나를 꼭 끌어안는다. 오른쪽 팔을 피해서 조심조심.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하니가 많이 걱정했어. 내일쯤이면, 볼 수 있을 거야. 하니는 너보다 회복이 빨라서, 내일부터 목발을 할 거래.” 

아, 다행이다. 

의사와 함께 아빠가 뛰어 들어왔다. 의사를 부르러 갔었구나. 호출을 하면 될 텐데. 아빠는 여전히 허둥지둥. 괜찮아요. 저 안 죽어요.

“혈압도, 맥박도 다 정상입니다. 뇌진탕 때문에,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그것도 차츰 회복하니까,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제야 아빠가 안심한다. 간호사가 주사를 놔주고 약을 챙겨준다. 수면 성분이 있는지, 잠시 쏟아진다. 자고 일어나면, 하니를 볼 수 있을까. 다시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과 놀 수 있을까. 환한 빛 속에서 손을 흔들던 할머니를 만 날 수 있을까. 


노란 은행잎에 떨어진 길 위로 목발을 한 하니가 걸어온다. 얼굴도 여기저기 멍이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그래도 하늘은 높고 푸르다. 딱 날기 좋게. 

절름절름 걸어온 하니가 나를 꼭 끌어안는다. 나도 무사한 팔로 하니를 안아준다.

“다행이야. 제이.”

“하니도.”

내가 깨어나지 않아서, 그는 얼마나 걱정을 했을까. 하니의 안색이 이렇게 창백한 건 처음 본다. 그리고 왜 이렇게 말랐어.

“목발은 괜찮아?”

“아니, 겨드랑이가 아파.”

익숙해지려고 엄청 노력 중이구나. 나도 모든 걸 왼손으로 하려니까 죽겠어. 

“나 꿈속에서 제이네 할머니 만났어.”

“어, 나도 만났는데!”

“나 제이를 데리러 제이네 집에 갔었어. 제이는 아주 꼬마였어. 책가방이 제이보다 더 크더라. 할머니가 대문 앞에서 손을 계속 흔들어줬는데. 기억나?”

“응! 하니도 엄청 꼬마였어! 연두색 가방을 메고 있었잖아.”

“임사체험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분명 할머니를 뵀어. 그치?”

“응!”

환자복을 입은 하니와 나. 이렇게 끌어안고 운다. 사람들이 힐긋대거나 말거나. 


벌써 노을이 진다. 오전 내내 검사를 받고, 오후 내내 잠을 잤다. 이제야 하니를 보러 나왔는데, 날이 저문다. 그만큼 우리의 상처도 빨리 나을까.

“제이, 보여줄 게 있어.”

하니가 서툴게 목발을 짚고 걷는다. 내가 기운만 세다면 업어줄 텐데. 다른 병동에 들어서도, 딱히 막아서는 이가 없다. 아마도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그렇겠지. 하니가 중환자실 문 앞에 선다. 목발을 짚은 하니 대신 내가 문을 열어준다. 


사지를 허공에 묶어놓은 환자는 처음 봤다. 팔다리만 붕대에 감긴 게 아니라, 얼굴 전체에도 붕대가 감겨있어서 누군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야?”

“응, 우리를 친 사람.”

“우리를 친 사람?”

“그래, 안나야.”

안나? 


머리가 쨍하고 아파온다. 아이스크림처럼 쏟아진 기억들이 다시금 머리에서 재조립된다. 그래, 우린 차에 치여서 길가 화단까지 날아갔다. 붕, 하늘을 나는 것처럼, 코스모스가 한들대는 화단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라고 했다. 다급하게 달려오던 하니가 눈에 떠오른다. 붕 하고 몸이 떠오르기 직전, 보았던 안나도 생각난다. 지옥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무시무시한 얼굴. 저 앤 두 번이나 날 죽이려고 했어.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거야?”

“길가 가로수를 박았어. 그 충격으로 안나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왔대. 안전밸트를 안하고 달렸었나 봐. 팔다리가 다 부러지고, 갈비에도 금이 갔어.”

이해가 되지 않아. 분명 사과를 하러 오는 거라고 했잖아. 마지막으로 우릴 만나는 거라고. 


“차 유리가 깨지면서 파편이 눈에 박혔대. 안나는 다시 날 볼 수 없을 거야.”

그건 너무 지독한 형벌.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독한 형벌. 하지만 눈물이 나오진 않는다. 안나는 내 마음에 있는 일말의 동정심까지도 부셔놨구나. 부서진 제 몸처럼. 

“근데 왜 아무도 없어?”

“두 분 다 안나를 보고 싶지 않아하셔. 간병인은 아마 밥 먹으러 갔을 거야.”

딸이 깨진 도자기처럼 산산조각나서 누워있는데, 보고 싶지 않다니, 이상해. 하얀 가운을 입고 있던 안나의 아빠와 화사하고 예뻤던 엄마가 생각난다. 더할나위 없이 화목해 보였는데, 이상해. 안나는 이제 어둠 속에 남겨졌는데. 아무도 곁에 없다니, 그건 너무 지옥 같잖아. 


“어떻게 오셨나요?”

간병인이 돌아왔다. 막 산 것 같은 잡지가 손에 들려있다. 심심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가요. 저 앤 중환자인데. 언제 위급해질지도 모르는데. 

“친구에요.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병문안 왔어요.”

“아, 그래요? 누구라고 전해줄까요?”

“의식이 있긴 한가요?”

“그럼요. 가끔 말도 해요. 이름이?” 

“이한입니다. 얘는 송제이구요.”

“이한 하고 제이. 와줘서 고마워요. 깨어나면 병문안 왔다고 전해줄게요.”

마지막 인사는 네가 아니라, 우리가 하게 됐구나. 안나. 부디 잘 견디렴. 우리가 없는 세상에서. 


가로등 불빛이 반짝반짝 들어온다. 빛 아래에선 아픔도 덜 한 것 같고, 슬픔도 덜 한 것 같다. 자판기에서 뽑은 코코아를 하니에게 건넨다. 나는 달달한 우유. 

“매직이 붙었대.”

오늘 들은 소식 중에 제일 좋은 소식이네. 

“와, 축하. 축하. 몽이 언니가 너무 좋아하겠다.”

“응, 내 다리만 나으면, 결혼할 거래.”

“빨리 나아야 겠네?”

“난 어쩐지 늦게 낫고 싶은데.”

하니가 심술을 부린다. 그러지 마아. 둘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그래서 둘 다 바빠. 신혼살림 사러 다니느라. 좀 천천히 가도 좋은데. 뭘 그리 서두르는 건지.”

“서두르는 건, 매직이가 아니라, 세탁소 아주머니 아니야?”

“둘 다야. 아니 누나도 포함.”

둘이 죽고 못 살아서 서두르는 건지, 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만, 설마 루비 언니처럼 고귀한 무언가를 만든 건 아니지?

“매직이 녀석 병문안을 온 게 아니라, 결혼 자랑하러 왔어. 세탁기는 뭘 샀네. 티비는 몇 인치네. 정말 눈꼴셔서 죽겠어,”

우리 하니, 많이 서운했구나. 

“그래도 우리 동네 1호 커플이네.”

“공식적으론 그렇게 됐어. 순이 누나랑 준이 형은 내년 가을에야 결혼하니까.”

그래도 잔치 얘기를 하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지네. 

“우리 다 나으면, 여행 가자! 제이랑 가려고, 나 월차도 아껴놨거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 나도 하니랑 여행 가고 싶어. 이 붕대를 풀고. 양팔로 하니를 안을 수 있는 그 날에. 꼭 같이 가고 싶어.


“밤새 여기 있을 거냐?”

우리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곰탱이 아빠를 타도하라! 아빠가 팔짱을 낀 채 하니를 노려본다. 하니가 멋쩍게 웃는다. 

“저녁은 드셨어요?”

“그래. 제이 몫으로 나온 맛없는 병원 밥을 꾸역꾸역 먹었지.”

“와, 건강식 드렸네요.”

아빠가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한다. 우리 소중한 하니에게 그러지 마세요.

“지하식당에 칼국수 맛있어. 겉절이도 맛있고, 계산 미리 해놨으니까. 가서 먹어.”

그러잖아도, 배가 고팠었는데, 센스쟁이셔.


왼손으로 하는 젓가락질은 슬프다. 게다가 하필 칼국수냐. 맛은 있는데, 왜 마음껏 먹질 못하니. 보다 못한 하니가 포크를 시켜줬다. 음, 유아기 때로 돌아간 기분이네. 그래도 먹을 수 있으니까. 행복해. 

“기타를 못 쳐서 답답하겠는데?”

“그동안 실력이 확 죽을 거야.”

“몇 달 못 친다고 그럴 리가 없어.” 

하니가 입가에 묻은 김칫국물을 닦아준다. 아, 다정해. 

“라디오도 엄청 펑크 났네?”

“응,”

과연 청취자들은 이해해 줄까. 아무리 사고였다지만, 너무 불성실한 DJ라고 욕하지 않을까. 

“고정 출연은 어떻게 됐어?”

“다행히 방송국에서 좀 미뤄줬어. 퇴원하면 바로 시작하려고 해.”

그건 케이의 노력. 그는 아직도 그 옛날 일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젠 그만 괴로워해도 좋을 텐데. 

하니를 병실 앞까지 데려다준다. 

“내일 삼총사들이 병문안 온대. 나보러 오는 것보다. 널 보러 오는 걸걸.”

“일타이피네. 날 보러 와서, 너도 보고.”

“그러게.”

목발을 옆구리에 낀 채 하니가 이마에 키스한다. 붕 떠서 화단까지 날아갔어도, 심장은 무사하구나. 이렇게 쿵쿵대는 걸 보니.

“내일 봐.”

“응.”


무미건조한 병원 풍경도 네가 있어 총천연색으로 물든다. 간호사들은 죄다 천사 같고, 의사들은 용맹한 기사 같다. 창백한 불빛도 따뜻하게 느껴지고, 이 차가운 바닥도 경쾌한 무도장 같잖아. 콧노래를 부르며 병실에 들어간다. 그새 아빠는 장의자에서 잠들어 있다. 엄마는 생계를 책임지러 가셨다. 아빠도 곧 따라 가실 거다. 하니와 나는 모레 퇴원한다. 이젠 밖에서 맘껏 만나야지. 팔, 다리는 자유롭지 않지만, 너와 함께라면 그 제약도 예쁜 추억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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