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스의 가호는 사라지고
어젯밤 내내 비가 쏟아졌다. 그것도 꽤 굵은 빗줄기였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웠다.
'에페스는 대리석 길이 많을 텐데, 미끄러우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매일 만보 이상 걷는 바람에 어느새 곯아떨어졌다.
새벽이 되자 빗소리가 그치고, 아침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춰 들기 시작했다.
비가 그친 후의 공기는 유독 맑고 상쾌했다. 온 세상의 먼지가 모두 씻겨 내려간 것처럼 선명하고 깨끗했다. 청량한 아침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걱정 끝에 맞이한 아침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밤새 내린 비가 하루를 더 빛나게 만드는 것처럼, 인생의 근심들도 결국 우리를 감사한 마음으로 이끄는 인도자인지도 모르겠다.
터키 현지에서는 에페스(Efes)라 부르는 에베소는 셀축(Selçuk)이라는 도시에 있었다. 이곳은 성지순례자뿐만 아니라 역사 덕후나 문화예술 애호가, 그리고 평범한 여행자에게도 설레고 매력적인 여행지다.
처음에는 아나톨리아의 한적한 토착 마을에서 시작했지만,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이 들어와 점차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 이름은 여성적인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하는 에페소스(Ephesus) 여신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6세기에는 리디아 왕국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가 꽃피었다. 기원전 129년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된 후, 인구 30만 명에 달하는 국제 도시로 화려하게 번성하면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 문명이 만나고, 이슬람과 기독교가 교차했던 땅.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아르테미스 신전이 웅장하게 서 있었고, 푸른 지중해와 에게해의 자연경관까지 수려했다.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꿈을 품고 이곳에 몰려들었다.
아침 일찍 사도 요한 교회(Basilica of Saint John)를 찾았다. 비가 내린 후라 그런지 공기는 맑고 마음도 한결 차분해졌다. 아직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조용한 시간, 사도 요한의 무덤 앞에 서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잔잔한 울림이 일어났다.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제자이기도 하다. 큰 사랑을 받은 만큼, 그에게 맡겨진 책임도 컸다. 하지만 그 사랑이 컸기에 무거운 책임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으리라.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초기 시대를 지나, 로마의 국교가 된 뒤에는 순교자나 사도들의 무덤 위에 기념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이곳 역시 그런 전통을 따라 요한의 무덤 위에 기념교회가 세워졌고, 그 옆에는 침례나 치유를 위한 세례탕도 마련되어 있었다.
문득 요한이 어쩌다 이 머나먼 아시아 땅까지 오게 됐을지 궁금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지키고 싶었던 간절함,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돌보고 싶은 애틋함이 천여 킬로미터의 험난한 여정도 두려워하지 않게 했으리라. 그건 의무감을 너머, 사랑에서 우러나온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제 라오디게아에서 만난 한국인 중년 부부의 조언을 따라, 우리는 에베소 북쪽 입구에 렌터카를 주차했다. 그곳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여럿 서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힐끗 보더니 딱 인상만 보고서 "꼬레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여러 권의 안내책자 중에서 한국어판을 척 펼쳐 보이신다. 계속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좀 힘들었지만, 우리는 이 할아버지께 호객당하기로 했다.
마차에 올라타자 또각또각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적한 시골 풍경이 천천히 스쳐갔다. 왠지 푸근한 시골 냄새와 나무 향기를 번갈아 맡으며 남쪽 입구까지 올라갔다. 남쪽에서 출발하면 북쪽으로 걸어가는 길이 내리막이라 훨씬 수월했다. 마지막에는 자연스럽게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시간도 아꼈다. 여행길에서 지나듯이 나눈 짧은 대화가 큰 도움이 되었다.
전체 지도를 보며 관람 포인트를 확인한 후 출발했다. 작은 극장 겸 회의장인 오데온(Odeon)이 보였다. 로마 사람들은 제국 곳곳에 이런 극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단순히 영토만 넓힌 정복자가 아니라, 문명을 퍼뜨린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의 가치를 알고 누릴 줄 알았기에 천 년이 넘도록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로마가 에페스를 장악하고 승리한 기념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조각상으로 새긴 멤미우스 기념비(Memmius Monument)를 보고 돌아서니 바로 도미티아누스 광장(Domitian Square)이 나타났다. 길 양편으로 유적들이 계속 이어지고, 사람들은 뒤에서 밀려오니, 내가 보고 싶은 건 잘 챙겨서 봐야 했다. 관광객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냥 걷다 보면 자칫 놓치고 지나치는 곳이 많겠다 싶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행정 개혁과 군사 정책, 그리고 대규모 건축 사업까지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황제다. 하지만 권력을 이용해 자신을 신격화하고, 초기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이렇게 역사 속 인물들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라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누군가를 쉽게 단정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광장 한편 폴리오 분수대(Pollio Fountain) 옆에서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니케를 만났다. 그때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걸어가던 터라 지나칠 뻔했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뭔가 싶어 멈춰 섰다. 우리가 요즘 익숙하게 보는 나이키 마크가 이 부조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드디어 헤라클레스 문(Hercules Gate)에 도착했다. 이 좁은 문이 바로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의 시작이다. 계단과 좁은 입구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마차나 수레가 다닐 수 없었다. 천 년 전에도 사람들이 걷기 좋은 보행자 전용 도로를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 길은 기원전 3세기쯤 자갈길로 만들었다가, 로마 시대에 대리석으로 다시 포장됐다.
트라야누스 분수대(Trajan Fountain)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로마 시대에는 대부분의 집에 상수도가 없어, 폴리오 분수대 같은 공공 분수대에서 물을 길어야 했다. 그에 비해 트라야누스 분수대의 물은 귀족 가정과 목욕탕, 수영장, 공공 청소를 위해 공급되었다. 분수는 도시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역할도 했지만, 시민이든 노예든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생명의 수원이기도 했다.
고급 주택가 테라스하우스(Terrace Houses of Ephesus) 앞에 바닥부터 화려한 모자이크 길이 보였다. 알리타르크스 스토아(Alytarch's Stoa)는 고대의 '럭셔리 쇼핑 거리'였다. 이곳의 상점들은 급이 달랐다. 동방 무역로를 따라 들어온 중국의 실크, 인도의 향료와 보석, 이집트의 고급 향유와 화장품을 만날 수 있었기에, 귀족들과 왕족들까지 쇼핑백을 들고 드나들던 곳이었단다. 클레오파트라도 안토니우스와 함께 이곳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니 그 명성이 대단했나 보다. 지금의 파리 샹젤리제나 엘에이 로데오 거리처럼, 고대에는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에베소의 이 거리였다. 명품거리의 원조가 이곳이었다.
로마의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평생 제국 곳곳을 순방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테네에서도, 안탈리아에서도 이 황제의 문을 봤는데, 이곳저곳 많이 다녀서 흔적도 많이 남아있었다.
하드리아누스 사원(Temple of Hadrianus) 앞에 섰다.
네 개의 우아한 코린트식 기둥이 하늘을 향해 서 있고, 그 사이 아치 중앙에는 날개를 단 니케 여신의 부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건물 정면 윗부분, 반원형 프리즈에는 아칸투스 잎 장식 사이로 메두사의 얼굴이 조각돼 있다. 재앙을 물리친다는 그 무서운 얼굴.
건축 전문가들은 이 아치를 에베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칭찬한다던데, 솔직히 나는 건축을 잘 모른다.
하지만 다른 게 보였다.
이천 년 전, 돌을 깎던 장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한 조각 한 조각 정으로 두들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치 중앙에 승리의 여신 니케를 새긴 건, 이 도시가 계속 번영하길 바라는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메두사의 얼굴을 새긴 건 불안과 두려움을 쫓아내고 싶었던 거다.
잘되게 해 달라는 기도. 나쁜 일은 막아달라는 소원.
2천 년이 지났어도 사람 마음은 똑같다. 우리도 여전히 복을 바라고, 액운을 피하려 애쓴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소망과 두려움은 변하지 않는다.
돌에 새겨진 기도가, 시간을 건너 내 마음에도 와닿았다.
사원 오른쪽으로 스콜라스티카 목욕탕을 지나자 고대 로마의 공중화장실, 라트리나(latrina)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우리 옆에 크루즈 관광객들이 있었는데, 그 인솔 가이드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여러분, 제가 오늘 한 이야기들은 배에 올라가는 순간 다 잊으실 거 알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기만큼은 다들 기억하시더라고요!"
관광객들이 한바탕 웃는 동안, 나는 이 독특한 화장실을 한참이나 살펴봤다. 열쇠구멍처럼 생긴 좌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고 나면, 발 앞으로 흐르는 물로 손을 씻을 수 있었다. 이곳은 남성 전용 유료 시설이었는데, 토가를 입은 로마 시민들은 볼일을 보면서도 서로 정치 이야기를 나누거나 철학을 주제로 토론을 이어갔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적 담론을 멈추지 않는 것, 참 로마인다운 발상이다.
드디어 에베소에서 가장 기대했던 셀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에 도착했다. 이곳은 과거 두란노 서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약 1만 2천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어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페르가몬 도서관에 이어 고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
서기 2세기, 로마의 소아시아 총독이었던 셀수스 폴레마이노스는 책을 무척 사랑했다. 셀수스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아퀼라는 아버지의 무덤 위에 도서관을 짓기로 했다.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아퀼라도 세상을 떠났고 그 후손들이 25년 만에 완성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이 지식에 얼마나 진심인 존재인지 느낄 수 있었다.
도서관 정면에는 네 여신상(Four Virtues)이 세워져 있었다.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Sophia), 미덕을 상징하는 아레테(Arete), 사고를 상징하는 엔노이아(Ennoia), 지식을 상징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가 그 주인공들이다.
지혜로 세상을 읽어내고, 미덕으로 인간관계를 맺으며, 깊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배우며 성장하는 삶. 2천 년 전 사람들이 소중히 여긴 가치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셀수스 도서관이 찾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특별하게 다가오나 보다.
안타까운 건, 원래 조각상들이 지금 여기 없다는 거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박물관과 이스탄불 박물관으로 흩어져 버렸다. 서양 학자들이 발굴하면서 중요한 유물은 자기 나라로 가져가 버렸다.
하지만 조각상은 옮길 수 있어도, 이 자리에서 느끼는 감동과 깨달음만큼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었다. 3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 지식을 향한 갈망, 그 마음의 결은 여전히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건 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에 가둬둘 수 없는 것이었다.
셀수스 도서관 옆에 자리한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Gate of Mazeus and Mythridates)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두 명의 노예에게 자유를 허락하고, 에베소에서 로마 제국의 재정을 관리하는 장교로 임명했다.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는 황제와 시민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이 문을 세웠다.
문득 담임목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감사는 받은 것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두 명의 해방 노예는 당대의 어떤 귀족들보다도 제대로 고마워할 줄 알았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분명히 알았고, 그걸 세상 앞에 고백할 용기가 있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다시 로마 제국의 관리로.
극적인 인생 역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교만하지 않았다. "내가 잘나서 여기까지 왔어"라고 으스대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은혜다.' 그래서 그 떨리는 마음을 돌에 새겨 영원히 남겼다.
가슴이 뭉클했다.
성공했을 때 오만해지기 쉬운데, 그들은 겸손했다. 올라갈수록 감사를 잊기 쉬운데, 그들은 기억했다. 그 마음이 돌에 새겨져 2천 년을 견뎌냈다.
로마가 1400년을 버틴 비결이 여기 있었다. 출신이나 배경이 아니라 능력과 인품으로 사람을 봤다. 기회를 줬다. 그리고 그 기회를 받은 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감사했고 충성했다.
제국의 힘은 군대만이 아니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의 마음이 진짜 저력이었다.
대극장에서 만난 특별한 친구
에베소 대극장(Great Theatre) 앞에 섰다. 이만 오천 명을 수용하는 규모. 이번 여행 중 원형 극장을 수없이 봤지만, 규모면에서 단연 최고였다. 기원전 3세기부터 300여 년에 걸쳐 확장되며 완성된 이곳에서는 문화 공연은 물론, 정치 집회와 검투사 경기까지 열렸다.
그런데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건축물의 웅장함이 아니었다.
서기 55년, 이곳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데메트리오라는 은세공 장인이 있었다. 그는 아르테미스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며 잘 먹고 잘살았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외지인이 나타나 "사람 손으로 만든 건 신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데메트리오는 불안했다. 생계가 위협받았다.
그래서 동업자들과 시민들을 모았다.
"저 외지인이 우리의 위대한 여신을 모독하고 있다!"
분노는 삽시간에 번졌다. 수천 명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폭동 직전이었다.
바울에게는 생사가 걸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소동 자체가 그의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증명했다.
보수 공사 때문에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대신 극장 근처에서 또 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동포동한 노란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네모난 돌기둥 위에 포즈를 취하고 앉아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터키의 길고양이들에게 익숙해져서 별로 놀라지도 않게 되어갈 즈음이었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여느 고양이들처럼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마치 카메라를 위해 일부러 포즈를 취해주는 듯했다. 그때 누군가 "얘가 에페스의 가필드예요!"라고 소리쳤다. 이 고양이는 인스타그램에서도 유명하다고 했다.
정말 @garfield_of_ephesus는 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가진 유명인사였다! 만화 속 가필드를 빼닮은 외모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동안 의연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났다.
대극장을 뒤로하고 에페스 체험관(Ephesus Experience Museum)으로 향했다.
최신 디지털 영상 기술로 에페스의 역사를 되살려 놓은 곳이었다. 화려한 영상들이 지나갔지만, 유독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아르테미스 여신 이야기였다.
에베소 사람들은 풍요와 다산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수호신으로 섬겼다. 그 여신이 도시를 지켜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번영했던 도시는 자연의 변화 앞에서 무력하게 쇠퇴했다. 신전은 불타고, 무너졌다.
에베소 사람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왜? 우리가 뭘 잘못했지?"
"여신은 어디 계신 거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상은 이렇게 끝났다. "여신은 이 도시를 버린 게 아닙니다. 여전히 지키고 계십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무거워졌다.
아직도 여신의 가호에 매달리는 마음이 느껴져서였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 한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지켜줄 거라 믿고 싶어 한다.
체험관을 나서며 묻게 된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 신인가, 운명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의 힘인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만으로도 반이상 답을 찾은 것이다. 맹목적으로 믿기보다, 계속 묻는 게 더 정직한 삶이니까.
체험관 관람을 마치고 테트라고노스 아고라(The Tetragonos Agora)를 향해 걸었다. 이곳이 한때 얼마나 북적이고 활기찼을지 상상해 봤다. 세계 각지에서 진귀한 물건들이 항구로 실려오고, 이 아고라를 통해 사고 팔렸다. 이곳은 에베소에 부를 몰고 온 중심지였고, 고대에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노예 시장도 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안선은 서쪽으로 7킬로미터나 밀려났고, 항구도 점차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무역 시장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지리적 조건이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역사적 현장이었다. 더불어, 자연의 거대한 변화 앞에 인간의 야심과 계획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점심은 셀축 시내의 작은 식당 셀축 코프테시(Selçuk Köftecisi)에서 먹었다. 내가 '카이막'에 반한 것처럼, 내 옆지기는 이 '코프테'에 반해서, 어제와 같은 메뉴를 또 주문했다. 바삭하게 구워진 겉면과 촉촉한 속살, 그 안에 스며든 양념의 풍미가 허기를 행복하게 채워줬다.
식당에 주차장이 없어, 식당 맞은편 유료 주차장에 렌터카를 세웠다. 그나마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울 수 있어서 감사했다. 점심시간이 살짝 지난 덕분인지 음식도 빨리 나왔다.
식사 후 주차비를 계산하려고 하자,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며 주차장 아가씨가 돈을 받지 않았다. 몇 푼 되지 않는 금액이었지만, 여행객이라고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베푸는 친절이 참 고마웠다.
에페스는 한때 로마 제국 소아시아의 수도였다. 모든 것의 중심으로 찬란했던 번영도, 아르테미스 신전의 화려함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한 것은 과연 존재할까.
이 도시에서 흥미로운 역설을 발견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인데, 바로 이 도시의 교회가 요한계시록에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았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하지만 생각해 보니, 책망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잠언은 "사랑하는 자녀는 성실히 훈계한다"고 말한다. 꾸짖음 속에는 애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회에게 주어진 책망 같은 그 말씀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처음 사랑만 되찾으면 된다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이 흐르다 보니, 바쁜 일상에 치여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처음의 설렘, 순수했던 열정,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관심.
나도 어쩌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원칙은 지키고, 책임은 다하고, 인내하며 버텨내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랑'은 어느새 식어버린 건 아닐까.
분명 내 신앙은 사랑의 감격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정도면 괜찮아, 난 주어진 걸 감당하고 있잖아'하고 스스로 만족하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주변을 불평하고 작은 일에 감동하지 못하는 메마른 나를 발견한다. 다시 처음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야 함을 느낀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겉으로 보면 에베소는 부럽고 화려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정작 내면의 진짜 물음은 바쁜 일상과 반복된 습관에 가려져 쉽게 들리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내게 묻는다.
"처음 만나던 날의 설렘이 여전히 네 안에 남아있니?"
에베소의 돌들이 수천 년을 견뎌온 것처럼, 내 마음속 사랑도 시간을 이기길 소망하게 된다.
신앙도, 인생도 결국 "처음 사랑"에서 멀어지는 순간 길을 잃는다.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조금 더 다정한 내가 되기를.”
이 도시는 그런 첫 마음, 처음 사랑을 조용히 일깨워주었다.
에페스 고대 도시 유적지는 셀축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입장료는 계절에 따라 변동될 수 있으니 사전에 확인하자. 여름철에는 무더위가 심하므로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녘 방문을 권장한다. 운동화는 정말 정말 필수다!! 볼거리는 많은데 바닥이 돌로 되어 있고 표면이 고르지 않아 조금만 방심해도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위험이 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처럼, 돌길 사이 홈에 발이 빠져 넘어지는 관광객을 또 목격했다. 그의 다리와 발목을 타고 흐르는 빨간 피를 보자, 정신이 번쩍 나서 걸을 때 좀 더 조심하게 됐다. 그제야 유적지 안내판 한쪽 귀퉁이에 구급차 번호가 빨간 글씨로 적혀 있는 이유도 알 거 같았다. 중간중간에 물을 살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으니, 물도 반드시 챙기자.
북쪽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마차를 타고 남쪽 입구까지 올라가서 내리막길을 따라 관람하면, (추가로 마차 비용이 들지만) 걷기 수월하고 시간도 절약된다. 원형 대극장 맞은편에 있는 에페스 체험관(Ephesus Experience Museum)도 들러보자. 입장권을 보여주면 무료입장이고, 여러 나라 언어로 된 헤드셋을 선택하면 된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 셀축 성채와 성 요한 묘, 마리아 하우스도 함께 둘러보자. 마리아 하우스는 유적지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이며, 현지 투어나 택시 이용이 편리하다. 기념품 가게에서 터키석과 카펫 등을 구매할 때는 흥정을 잊지 말자.
여행자의 노트: 생각 한 스푼 더
에베소의 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언덕 위에 서 있다. 발아래로는 고대 도시의 잔해들이 오랜 세월을 버텨내며 펼쳐져 있었다. 바로 이 어딘가에, 예수님의 마지막 제자였던 요한이 잠들어 있다.
그의 무덤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이 땅에서 한 노인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그의 고백이 이 언덕을 스치는 바람결에 조용히 들려오는 듯하다.
사도 요한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변할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 '우뢰의 아들'이라 불렸다. 내 옆지기 어릴 때 별명이 '벼락'이었다는 시어머니 말씀이 떠올라 웃음이 피식 났다. 어쨌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거다.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벌하자고 할 만큼 급하고 과격했고, 엄마 찬스를 이용해서라도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좌의정, 우의정이 되고자 했던 야망 많고 허영심 가득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에베소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던 요한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너무 늙어 더 이상 혼자 걸을 수 없게 되자 제자들이 그를 업고 교회에 모셔왔다고 한다. 그런데 매번 똑같은 설교만 했다.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이 항상 같은 말씀만 반복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주님의 계명이 바로 이것이고, 이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지.”
에베소에서 사도 요한의 흔적을 찾아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한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겠구나.'
그건 선택이었고, 결단이었으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훈련이었으리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숨을 거두며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했던 그 순간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진심으로 자신의 어머니처럼 보살폈다. 어쩌면 이것이 사랑의 첫 번째 실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갔을 것이다. 사랑은 분노를 이기는 힘이고, 욕심과 야심을 내려놓는 용기이며, 자신의 옳음보다 상대방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는 마음임을 깨달았을 거다. 그래서인지 요한의 편지들은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로 가득 차 있다.
요한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안다."고 했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땐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사랑이라는 걸 해보니 알게 된다. 이건 종교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였다.
진짜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은 내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을 다해도, 때론 내 능력 밖의 일들이 생긴다.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고,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순간들. 그제사 사랑이라는 건 '나'라는 작은 존재를 넘어서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나를 초월해서 뭔가 더 크고, 더 깊고, 더 영원한 존재와 연결될 때만 사랑이 가능해진다.
그 존재를 하나님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우주의 섭리라 말하는 이도 있다. 혹은 그저 인간 안에 있는 선한 본성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뭐라 부르던지 상관없이,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말이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이건 한 노인이 평생을 살며 온몸으로 깨달은 진리였다.
시간은 잔인한 강물처럼 에베소의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다. 한때 3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북적대던 도시였지만, 지금은 시즌에 관광객이 찾는 고고학 유적지가 되어 버린 곳. 하늘까지 닿을 듯이 우뚝 서 있던 127개의 아르테미스 신전 기둥도 이제는 단 하나만 쓸쓸하게 남아 있고, 화려했던 셀수스 도서관도 파사드만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과거의 영광을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비해, 요한이 남긴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와 지금 누군가의 마음에 와닿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게 ‘영원’의 모습 아닐까.
어떤 사도의 무덤을 직접 와봤다는 게 내 인생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 건 그가 남긴 질문이었다.
‘우리는 정말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을까?’
‘혹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고 비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서로 사랑하며 살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또 용서받고 싶은 마음은 종교를 초월해 모든 인간이 품는 가장 보편적인 바람일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 갈망에 가장 정직하게 답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순교의 길을 떠난 뒤에도 그는 살아남아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했다. 어쩌면 그게 더 어려운 길이었을지 모른다. 죽음을 택하는 것보다 살아남아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게 더 힘든 일일 수 있으니까.
우리 모두는 이 사랑을 배우는 중이다. 때로는 '우뢰의 아들'처럼 성급하고, 때로는 세속적인 야심에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경험이 결국 '사랑'이라는 곳을 향한다면 포기하지 않게 된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요한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면, 생의 마지막에 "서로 사랑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면, 그게 인생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귀향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