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소녀가장 10
"엄마, 왜 우리는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다녀야 해? 우리도 우리 가족끼리만 휴가 가면 안돼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현정이 큰 아들이 묻고 따졌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 아빠랑만 다니는데 왜 우리 가족은 항상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랑 같이 다녀야 되냐는 것이다. 외조부모님이 심심하고 적적하시니 같이 모시고 나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참여율이 100% 일 필요는 없지 않냐는 것이다. 작게는 집 앞 식당 외식이나 마트 장보기부터 백화점 쇼핑, 국내외 휴가까지 모두 외조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현정이의 사춘기 아들은 못마땅한가 보다.
큰 아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매일 밤 외할머니와 같이 잤던 '외할머니 껌딱지'였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지금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분가를 한 뒤에도 밤 9시가 되면 꼭 할머니 집에 가서 잤다.
할머니에게는 손주뿐이라서 자기가 할머니를 지켜줘야 된다며 할머니는 혼자서 못 잔다고 말하던 아이였다. 그러게 전처럼 다 같이 살면 되는데 왜 이사를 와서 집이 2개가 되었냐며 아들은 다시 전에 살던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참 동안 달고 살았다.
8살짜리가 어른을 지켜줘야 된다니... 아이의 마음에서 우러난 말인지 외할머니가 은연중에 아이한테 세뇌를 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정이는 서두르지 않았고 매일 밤 아이를 엄마 집으로 보냈다. 단, 아이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 무조건 우리 집에서 자는 걸로 약속했는데, 2학년이 되는 것을 아득한 먼 미래로 느꼈던 1학년 아들은 순순히 그 약속에 응했다.
그랬던 아이가 변했다.
자라면서 엄마, 아빠와만 다니는 다른 친구들 가정의 모습을 많이 봐와서 자신의 가족이 이상해 보이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같이 외출하면 꼭 사람들 보는데서 큰 소리로 욕을 섞어가며 싸우고 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아이 눈에도 부끄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청각장애 때문에 현정이 어머니의 목소리는 기본 데시벨이 엄청 높아졌는데 공공장소에서도 어머니는 볼륨 조절을 못 하셨다. 기분 좋게 시작한 가족 외식이나 가족 여행도 두 분이 큰 소리 내며 싸우는 탓에 망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어눌하게 행동하는 남편을 일일이 챙기며 사시느라 생긴 화병 때문인지 현정이 어머니는 언성뿐 아니라 분노 조절에도 문제가 있었다.
다른 낯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는 건 차라리 괜찮았다. 현정이는 남편에게 저런 부모님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이는 것이 정말 수치스러웠다.
애초에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아서 부모님이 계속 고향에 사셨다면 남편은 장인 장모를 연중 명절에나 한두 번 뵈었을 텐데. 그러면 감출 건 감추고 현정이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가까이 지낼수록 드러나는 극한의 치부를 남편에게 다 들키는 것이 현정이는 너무 짜증이 났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현정이 부부는 은퇴가 빠른 영업직의 특성상 다닐 수 있을 때 까지는 둘 다 회사를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육아 때문에 둘 중 한 명이 그만둬야 되는 상황이 온다면 누가 그만둬야 될지도 애매한 문제였다. 6살 어린 현정이가 후배이긴 하지만 남편과 직급도 똑같은 상황에 여자라고 해서 현정이가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를 하는 것도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오래 다닐 수 있는 걸로 치면 차라리 현정이가 회사를 다니는 편이 더 이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정이 친정부모님이 두 아들을 잘 키워주셔서 부부 둘 다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걸 생각하면 사실 현정이가 더 큰소리쳐야 될 상황인데 현정이는 항상 남편의 눈치를 보고 산다.
결혼기념일에 부부끼리 식사 한 끼를 하는 것도 같이 사는 부모 놔두고 지들끼리만 외식하는 싹수없는 불효자식들이라고 생각하는 장인 장모에게 불편한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십 년을 매사에 함께한 남편이다. 그래서 현정이는 잔소리도 못하는 아내가 되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며 같은 시간에 퇴근하지만 남편은 매일 퇴근 후 취미활동을 한다. 운동모임에 나가거나 술자리도 자유롭게 즐긴다. 현정이는 퇴근 후 애들 씻기고 숙제 봐주고 다음날 준비물 챙기고 설거지, 청소, 빨래를 하지만 현정이 남편은 결혼 전과 후, 아빠가 되기 전과 후의 생활이 변함이 없다. (현정이 남편이 계란 프라이를 만들 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인 것이다!)
문득문득 현정이에게 왜 나만 동동거리고 살아야 하나 라는 억울한 심정이 올라와 남편에게 일찍 귀가하라고 잔소리라도 좀 할라치면 남편은 "내가 집에 일찍 들어가면 장인어른, 장모님도 불편하시잖아."라는 치트키를 쓴다. 그러면 현정이는 할 말이 없다.
친정부모님과 합가 했을 때부터 남편은 매일 늦게 들어왔는데 이제는 현정이도 퇴근 후 독박 살림, 육아를 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분가를 한 이후에도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 이제 남편이 일찍 들어오면 아이들이 아빠랑 장난치느라 취침시간도 늦어지고 평소 루틴이 깨져서 오히려 남편의 이른 귀가는 현정이의 고요한 일상에 방해 요소가 되었다.
현정이는 집에서도 늘 다른 사람 눈치만 본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면 남편이 기분 상했을까 눈치가 보이고 남편이 무슨 말을 했는데 엄마 표정이 싸하면 엄마 눈치가 보인다. 엄마를 두고 외출하자니 엄마 눈치가 보이고 엄마를 데리고 나가자니 남편 눈치가 보이고 이제는 아들 눈치까지 보인다.
명절에 친척 어르신들이 모이면 우리 아들에게 한 마디씩 한다.
"이 자슥아, 니는 외할매한테 잘해라. 외할매가 니 키워줬다 아이가. 할매, 할배한테 효도해야지."
아들은 어린 아기였고 애초에 선택권이 없었다. 아들은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조부모님의 돌봄이 평생 아들에게 조부모님에 대한 효도 압박 같은 것으로 작용했다.
아들을 현정이 친정부모님 손에 맡긴 것은 현정이와 남편의 선택이었고 친정부모님의 수고에 대한 보답의 의무를 져야 된다면 현정이와 남편 선에서 끝나야 했다. 아들이 조부모님을 섬기는 것은 아들의 자유의지에 맡겨야지 친척들이 강요할 문제는 아니었다.
현정이의 친척들은 장애인이 둘이나 되어버린 현정이의 친정을 더 살뜰히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들의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현정이 아들에게 잔소리하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현정이는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혹시나 어린 아들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부채의식 같은 것을 갖게 될까 걱정이 되었고 아들에게 미안했다.
이제 현정이는 부모와 남편에 이어서 자식 눈치까지 보게 되었다.
사진출처 : https://www.pngkit.com/downpic/u2q8a9a9q8u2o0o0_sad-girl-png-sad-korean-girl-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