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소녀가장 12
"원래 가족이 힘이 돼줘야 되는 거 아니냐? 근데 나는 친정엄마가 나를 제일 힘들게 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될 순간들을 엄마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게 보냈어. 결혼을 할 때도 그랬고, 아이를 출산할 때도 그랬어. 정말 엄마 때문에 이민 가고 싶어. 어디 멀리 도망가서 남편이랑 아이만 신경 쓰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재은이 엄마는 딸의 출산을 앞두고 노산인 딸이 제왕절개 수술을 선택하지 않는 것을 두고 또 재은이를 못살게 굴었다. 타고난 골반이 크고 역아도 아니라 충분히 자연분만이 가능하다는 의사의 판단으로 자연분만을 결정한 것인데, 엄마는 40년 전 자연분만을 시도하다 고생만 하고 끝내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던 자신의 경험을 들어 너는 내 딸이니까 너도 자연분만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정 지으셨다.
재은이를 설득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친정엄마는 재은이의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사돈이 내 딸을 좀 설득해달라고 마흔이 다 된 삐쩍 마른 애가 자연분만이 말이 되냐고 시어머니께도 떼를 부렸다. 이제는 두 집 어머님들이 돌아가며 재은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왕절개 수술을 강요하는 식이 되었다.
재은이의 몸이었고 재은이의 자식이었기에 재은이는 자연분만에 대한 결정을 고수했고 무통주사 천국을 맛보며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출산드라처럼 아들을 쑴풍 낳았다. 큰 고생 없이 출산했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이유는 엄마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할 수 있어서였다.
별일 없는 친정엄마의 일상에 외손주의 탄생이라는 대박사건이 터졌으니 재은이 엄마가 수시로 전화를 해대는 통에 재은이는 5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엄마와 같이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직장 핑계도 대지 못하고 수시로 전화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 영상통화로 엄마를 상대해주려니 재은이에게는 신생아 돌봄보다 친정엄마 돌봄이 더 피곤한 지경이 되었다.
아기의 출생신고를 위해 아기 이름을 고민하던 중에 친정엄마가 또 스님 이야기를 했다. 양가 집안에서 오래도록 기다려온 귀한 아기인 만큼 의미 있고 좋은 이름을 지어주어야 되는데 아기의 태명이 이 아기와 너무 잘 맞기 때문에 태명을 본명으로 올리라고 하셨다.
재은이 아기의 태명은 '행복'이었다. 잉태된 순간부터 행복한 일만 누리며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 남편과 재은이가 지어준 아기 태명이었다. 태명의 의미가 정말 좋다는 말이야 맞는 말인데 재은이 부부의 생각이나 취향과 '행복'이라는 아들 이름은 거리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재은이의 반응에 엄마는 시댁에 또 전화를 하셨다. 사돈끼리 선물도 자주 주고받고 통화도 자주 하며 친하게 지내는 것 까지는 좋은데 재은이 엄마가 종종 선을 넘는 게 문제였다. 친정엄마는 시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아기 이름으로 '행복' 이로 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셨고 사돈이 직접 전화도 주셨고 좋은 게 좋은 거라 여기시는 시어머니도 설득이 되기에 다다랐다.
진작에 부르기 좋고 부부 마음에 드는 순수 한글 이름 몇 개를 아기를 위해 생각해두었던 재은이 부부는 자신들의 자식 이름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고 짜증이 났다. 무슨 한글 이름이냐며 아기의 인생이 걸린 이름을 그렇게 절차 없이 가볍게 짓는 것이 말이 되냐고 펄쩍 뛰는 두 집안의 어른들 때문에 50만 원을 내가며 철학관에 들러 자신들이 생각해놓은 한글 이름의 한자 뜻을 받아와서 출생신고를 마쳤다.
친정엄마의 말에 반대의견을 내거나 전화를 한 두 번만 받지 않아도 친정엄마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늙은 엄마 말이라고 무시하냐"로 시작되는 히스테릭한 레퍼토리를 시연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워 처음에는 아빠가, 다음에는 남동생이 차례로 재은이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성격 네가 잘 알지 않느냐. 네가 이해하고 풀어줘라."로 귀결된다.
그렇게 엄마를 잘 이해하는 남동생과 아버지라면 평소에 엄마랑 싸우지나 말지. 평소에는 재은이 남동생도 엄마랑 싸우면 재은이에게 전화해서 하소연이었고 아빠도 엄마와 다투면 재은이에게 하소연이었다. 매일 전화하는 엄마가 자기 입장에서 화풀이하는 것은 재은이의 일상임은 당연한 것이다.
가족들이 엄마와 갈등이 있을 때는 본인들의 입장을 관철하고 엄마를 이해 못하면서 엄마와 재은이가 갈등이 생기면 하나같이 재은이에게 져주라고 하고 엄마를 이해해주라고 한다.
모든 가족이 재은이를 거쳐야만 소통할 수 있는, 재은이는 친정에서 소통의 로터리 같은 존재였지만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로터리를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삶을 살았다.
몇 번 이런 일이 반복되니 이제는 웬만하면 처음부터 엄마 말을 들어주거나 시늉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감정적 에너지 소모가 덜한 쪽이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내 친구 재은이가 부러웠다. 재은이네 집은 아이가 아이답게 살 수 있는 집이었다. 어린아이가 돈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고 1년에 한 번씩, 갈수록 더 좁고 이상한 집으로 이사를 가는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될 필요도 없었다. 재은이네 집은 아이가 고3 때는 '고3 대우'도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집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대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할 때도 항상 혼자였던 나와는 달리, 재은이 부모님은 주기적으로 딸을 들여다보러 오셨고 이사처럼 큰일이 있을 때는 집을 구하는 과정부터 이사 날 정리까지 같이 도와주셨다.
하지만 재은이는 친정의 가난을 둘러메고 살더라도 내가 부럽다고 했다. 엄마와 한 달에 한번 통화하는 내가 부럽다고 했고 인생에서 대소사를 오롯이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 부부가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는 점이 부럽다고 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엄마의 말에 "엄마가 해준 게 뭐 있다고!"라고 되받아칠 수 있으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다고도 했다.
경제적인 책임을 둘러메고 사는 딸도 소녀가장이지만 친정의 정서적인 책임을 둘러메고 싸는 딸도 소녀가장이다.
재은이에게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라는 책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제목만 들어도 그 내용을 너무 뻔히 알 것 같아서 손이 가지 않는 책이지만, 책 제목으로 나올 정도로 엄마의 욕받이 딸들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 자체가 재은이에게도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