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불굴의 정신과 똥고집

관계와 인연에 대한 탐구 18

by morgen


위대한불굴의 정신과 미치고 팔짝 뛸 똥고집


친정어머니는 그 사람 자체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와 결혼하는 것은 반대하셨다. 반대의 이유는 참으로 옹색했는데 가난하고 키 작고 형제 많다는 이유였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눈딱지가 고약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반발하는 그의 답은 이랬다. 가난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 부모님이고, 키 작은 것도 자신의 잘못은 아니며, 형제가 많은 것 역시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한 무언가를 지적하시면 그 점을 고치겠지만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조건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변이었다. 그에 할 말이 없어진 어머니는 눈딱지가 고약하게 생겼다는 뜻밖의 트집을 추가시켰다. 그것은 그의 환경이 아닌 그 자신의 문제이니까 그의 결격사유가 되는 것이었다.어머니는 유복자로 키운 딸과 헤어진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런 그와 나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 아들이 둘인 나의 친정 어머니는 우리집에서 30여년 넘게 함께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남편은 장모님과 함께 사는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장모님은 우리의 결혼을 반대했었다’는 복수의 언어를 내뱉은 적이 없다. 나는 그의 어떤 점에 사로잡혀 어머니가 반대하시는 결혼을 했던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이었다.

그는 존경할만한 청년이었다. 자신보다는 나라를 더 사랑했다. 가난한 부모를 외면하지 않는 효자이고, 여러 형제자매의 애정이 남달리 진한 우애 좋은 사람이었다. 신념은 굳고 굳어서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극한의 어려움과 대면해서 싸우는 멋진 남자였다.

불굴의 의지를 지닌 멋진 청년, 더구나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어찌 그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혜안을 가진 처녀가 아니라 세상 바보멍청이였던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아직도 떠나지 않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않는, 그와 나의 이야기.


그렇게 멋져보이던 그의 불굴의 의지는 어느 순간 미련한 똥고집이 되어 나를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위대한 애국자인 그의 언행은 자신은 하지 못하는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측근들에게 생활비를 쪼개주는데 나는 반대도 못하고 자랑스럽지도 못한 어정쩡한 바보가 되었다. 진심으로 우러러보던 그의 효심은 월급액수와 상관없이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렸고,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던 형제간의 우애 때문에 몇몇 동생들과 신혼 때부터 함께 살아야 했다.

나는 그의 위대한 인격에 한참 못미치는 아내여서 그런 그가 무척 자랑스러웠고, 처음엔 얼떨결에 그가 하는 대로 보고 있다가, 점차 그에 세뇌되어서 나도 덩달아 참 좋은 아내와 효심있는 며느리와 우애있는 형수가 되었다. 돈이 필요하면 수입을 따지지 않고 지출했고, 노동이 필요하면 허리가 꼬부러지도록 일을 했고, 넓은 이해력이 필요할 때 천사와 같은 포용력을 진심으로 자발적으로 베푸는 자로 변해있었다. 정말 진심이었다. 그런 생활은 위선이 아니었고, 진심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우리는 의지하며 이해하며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살았다.


어느 순간 너무 무겁고 어둡고 버거워서 벗어나고 싶어질 때는 그 동안 나의 언행이 몽땅 다 위선으로 평가될까봐 그것이 억울해서 참고, 한참 지나다가 또 다시 그런 시점이 되면 또 참고…. 그 세월이 어리숙했던 것인지 지혜로웠던 것인지….

나는 마약에 취해있었다. 그가 나를 지칭하는 “나의 양심” “나의 천사” 이런 마약은 사람을 몽롱하게 하는 특제 마약이다. 그에 중독되어 몽롱하게 한 세월 보냈는데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의 곁에 있다. 내가 투덜거리던 불평불만들은 나 위주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들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옳은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평가를 신중하게 구분하면서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나의 사고방식이 유지되는 한, 그가 존경받지 못할 비굴한 인격으로 추락하지 않는 한 나는 그의 곁에 머물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엄청 많이 굉장히.

사랑이라고 믿었던,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순결하다고 믿었던 그 감정들이 이제 생각해보면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오만이나 교만에 더 가까운 감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그의 곁에서 그를 돕지 않으면 그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꼭 내가 그를 도와야만 그가 뭔가 제 몫을 하는 남자로 완성되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고 확신했다.


그와 결혼했다.

그 당시 그를 그만큼 키운 것은 내가 아니었지만, 우리가 함께 한 이후로 그의 인생 나머지 부분은 나의 손에 의해 완성되리라고 믿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내가 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느낌보다, 내가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나에게 큰 행복감을 주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내 존재의 확인에 나 스스로 만족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사랑을 할 때 사람에게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 그 자체에 빠지는 것이라는 생각. 주체할 수 없는 자기 감정에 푸욱 삐져서 허우적거린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생계 대책도 없이 결혼했다. 오만하리만치 강렬한 사랑이 아니면 생활을 버텨나갈 힘이 없었다. 정신나간 철부지의 억지 사랑이 아니면 생활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랑이었다면 그 어려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 보다는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홀린다”는 말에 꼭 맞게 나는“사랑”이라는 것에 홀려서 세상에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사랑의 체온에 대해 무감각해질까 봐 따뜻한 생활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포만감을 느끼는 기름진 생활은 그에게서 받은 것을 담을 자리가 없게 할까 봐 불안했다. 우리의 추위는 오로지 서로의 체온만으로 녹여지고, 헛헛함은 서로의 숭고한 사랑만으로 배부를 수 있기를 바랐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고, 알았다는 표식을 감추고, 바보처럼 모르는 척 참아내며 자주 뜨거운 무언가를 꿀꺽꿀꺽 삼키며 살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걱정이 상대방에게 위로가 아니라 짐이 되지 않도록 가만히 있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그가 곤경에 처한 것 같으면 위로한답시고 옆에서 얼쩡거리는 것보다는 그냥 흔연히 잘 지내는 것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와 나 사이의세월은 그러했다.

모든 일이 잘되고 씽씽 잘 돌아가는 좋은 상태에 있을 때는 그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느슨한데, 그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가 힘들 때 기대고싶은 사람이 나라면 나는 그것으로 가장 행복하다. 그가 내게 의지할 때 나는 그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좋은 일은 다른 사람과 나누라, 괴로운 일은 나에게로 가져오라, 나는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곁에 있어주는 마지막 한 사람이고 싶다. 가득히 가지고 있을 땐 다른 사람에게 모두 나누어 주라, 그러나 무언가 모자랄 땐 내게로 오라, 그 결핍을 채우는 일이 나의 몫이라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것이 나의 사랑 방법이다.


그를 맨 처음 만난 곳은 탁아소였다. 사람들은 이 탁아소라는 말만 듣고는 깜짝 놀란다. 어린이집 친구였나? 아니다. 1960년대 중반, 우리가 있던 소읍에는 영어 원어민 선생님이 없었다. 인근 도시 대전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외국인 선생님이 오셔서 영어를 가르쳐주셨다. 그 영어 학급에 그는 그의 중학교 대표로, 나는 우리 학교에서 참석하여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때로부터 서로 데면데면하다가, 가까이 다가가 뜨거워지다가,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어져 딴 사람에게 한눈도 팔다가, 다시 서로에게 감전되어 결혼을 했다.

함께 한 시간보다는 이제부터 함께 할 시간이 짧은 것이 확실한 시점에 우리는 함께 서있다. 아직 사랑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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