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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기억 - 상실과 창조

엘리 비젤, 마야 린, 피카소

by morgen

5부 예술의 경계 - 실제 작품 중심

25화 예술과 기억-상실과 창조


인간은 상실을 겪을 때마다 기억을 붙잡으려 한다. 잊어버리는 순간,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은 단순한 보존이 아니다. 기억은 예술을 만나면서 새로운 창조의 형태가 된다. 글과 그림, 조형과 공간 속에 기억은 다시 태어나고, 그 속에서 인간은 상실을 견디는 힘을 얻는다. 마지막 화에서는 세 사람—엘리 비젤, 마야 린, 피카소—의 예술을 통해 기억이 어떻게 창조로 변모하는지 살펴본다.


증언으로 남은 기억 – 엘리 비젤(Eliezer "Elie" Wiesel, 1928-2016)

엘리 비젤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 그의 글은 개인적 상처를 넘어 집단의 기억이 되었다. 대표작 <밤>(1956)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참혹한 경험을 담은 회고록이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잊히지 않는 기억,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인류의 가장 어두운 심연과 마주해야 했던 어린 유대인 소년의 처참한 경험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단순한 언어 속에 오히려 더 큰 공포와 상실이 느껴진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을 신앙이 산산이 조각나고, 순수함을 잃고, 생존이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에 맞선 도덕적 투쟁으로 변모하는 세상으로 이끈다. 신, 정체성,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비젤의 이야기는 삶의 연약함과 기억의 영원한 힘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비젤은 “기억하지 않는 것은 다시 반복되는 죄악”임을 경고한다. <밤>은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예술적 증언이자 윤리적 행위였다. 비젤의 글은 죽은 자들을 잊지 않게 하는 창조적 힘이었고, 동시에 독자에게 역사와 책임을 되새기게 한다. 무관심이 여전히 드리워진 이 시대에, 비젤의 가슴 아픈 글은 우리에게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다하고 증언하도록 촉구한다.


<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람 옮김. 2023. 위즈덤하우스.

"그러나 이제는 간구하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내가 매우 강해진 것을 느꼈다. 나는 고발자였고, 고발당한 쪽은 하나님이었다. 나는 두 눈을 뜬 채 혼자 있었다. 하나님도 없고 사람도 없는 이 세상에 정말 나 혼자 있었다. 사랑도 없고, 자비도 없었다. 나는 잿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삶을 오랫동안 지배한 전능자보다 강하다고 느꼈다." 135쪽

"우리는 가담해야 합니다. 중립은 가해자만 도울 뿐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침묵은 결과적으로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입니다." 216쪽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문'


엘리 비젤은 루마니아 왕국에서 헝가리계 정통 유대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4년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2차대전 끝난 후 프랑스 고아원에 보내졌고,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했다.

1955년 뉴욕으로 이주했고, 1963년에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그는 폭력과 억압, 인종차별과의 투쟁에 앞장선 공로로 1986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기억을 위한 공간 – 마야 린(林瓔, 1959- )

마야 린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워싱턴 D.C.에 세워진 <베트남전쟁 기념비>(1982) 설계 공모에서 당선되었다. 그녀의 기념비는 화려한 조형물이 아니라, 땅을 파내려간 듯한 검은 화강암 벽이다. 그 위에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5만 8천여 명의 병사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벽 앞에 선 관람객은 이름과 동시에 자기 얼굴이 반사된 모습을 마주한다. 이는 곧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체험이다. 이 기념비는 전쟁을 영웅화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의 상실을 집단의 기억으로 이어주는 공간이 된다. 마야 린의 작업은 예술이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기억을 담는 살아 있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매끈한 검은 벽에는 2010년에 추가된 이름들을 포함하여 현재 58,26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장벽은 미국인들이 과거를 되돌아보는 새로운 방식이 되었다. 장벽이 상징하는 것, 장벽이 자극하는 것은 승리와 패배, 잔혹함과 진보가 치르는 깊은 인간적 대가를 포용하는 방식이다.

베트남전의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 적어도 60년대 급진주의의 교훈에 귀 기울이고, 적어도 우리 자신과 서로에게 문을 열려고 노력하도록 도왔다. 현재 전 세계 수십 개의 기념관이 린의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장벽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을 얼마나 심오하게 변화시켰는지, 적어도 잠시나마, 증명해 보여준다.

예일대 학부생이었던 린은 1981년 워싱턴 DC에서 주최한 "베트남 참전 용사 기념관 전국 디자인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여 전국적인 인정을 받았다.



고통을 이미지로 – 피카소의 <게르니카>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작은 마을 게르니카가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에 피카소는 거대한 캔버스에 비극을 기록했다. <게르니카 Guernica>(1937)는 가로 7.7m, 세로 3.5m의 흑백 대작으로, 현재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찢긴 육체, 울부짖는 여인, 쓰러진 말, 파편화된 전구가 화면을 뒤덮는다. 이 작품은 단순히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보편적 고통과 상실을 압축한 상징이다. 관람객은 특정한 폭격 사건을 넘어서, 인간사가 겪은 모든 폭력과 슬픔을 떠올리게 된다. 피카소는 고통을 이미지로 바꾸어, 기억의 보편화를 이룩했다.


그림 출처 https://www.pablopicasso.org/guernica.jsp


게르니카 폭격 이후, 피카소는 자신의 조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의뢰로 1937년 여름 개최될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한 벽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구상했던 그림을 버리고 1937년 5월 1일 게르니카 작업에 착수했다. 그해 여름 파리 박람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이 그림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게르니카>는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생명의 파괴를 상징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마을의 악몽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 거주하던 피카소는 한 독일 장교가 아파트에서 게르니카 사진을 보고 "네가 그린 거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피카소는 "아니, 네가 그렸어."라고 대답했다. 이 그림은 과연 누가 그린 것일까? 독일군일까, 피카소일까? 피카소의 대답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억과 창조의 경계에서

엘리 비젤의 글은 증언으로, 마야 린의 기념비는 이름을 새겨 기억하는 공간으로, 피카소의 그림은 전쟁을 집단적 이미지로 만든 창조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이들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상실을 기억으로, 기억을 창조로 전환했다.

예술은 이렇게 인간의 고통을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주고, 그 고통을 다시 삶의 힘으로 바꾸어준다. 상실은 비극이지만, 그것을 예술로 기록하는 순간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이 열린다.


이제 연재의 마지막 장에 다다랐다. 경계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여정은 결국 기억과 창조의 자리에서 마무리된다. 경계는 사람을 나누고 삶을 가두기도 했지만, 예술은 언제나 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예술을 찾는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상실 속에서 잊지 않으려는 의지, 그리고 기억을 창조로 바꾸려는 힘. 예술은 결국 경계 너머의 또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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