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좋아?'라는 질문에 답하자면 밑도 끝도 없겠지만 나의 모든 대답들을 함축하자면, 나는 마음이 단단한 사람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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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흥분하거나 지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그 길 위에서 겪는 굴곡들에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며 잔잔한 미소를 띄울 줄 아는 사람. 때로는 여린 마음을 가진 다른 이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는 사람. 혹은 자신을 향한 공격들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벽을 가진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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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단단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늘 기복 없이 차분하게 살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슬픈 일에 쉽게 눈물 흘리지 않았으며 상처받은 일을 오랫동안 곱씹지도 않았다. 직접 나서서 타인의 마음을 안아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날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일부러 나와 어깨를 부딪히는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성에서 살던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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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그런 내게 정신력이 강하다고 말했다. 뒤에서는 지독한 기집애라는 수군거림이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평가조차도 신경 쓰지 않는 의연함이 나의 단단함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한결같이 그래왔다. 그리고 아주 극단적인 사건들이 여러 번 닥쳐도 그러길래, 나는 그게 나다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평생 나답게 살아가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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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에 돌 던진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은 얕고 작은 연못이라서, 조약돌 하나에도 온 마음이 파동에 흔들린다. 혹은 좁지만 깊은 우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을 향해 날아온 돌들을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혀 숨길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이 아주 넓고 깊은, 태평양같이 끝없는 바다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많은 돌을 던져도 넘치거나 파도가 일지 않는 그런 고요한 바다 말이다. 가끔씩 날아오는 묵직한 바위마저도 보이지 않는 심해로 침몰시키고 금세 잠잠해지는 마음이었다. 그때 내 마음은 아주 깊고 넓어서, 수없이 날아오는 돌들은 전부 보이지도 않는 어두컴컴한 심해로 가라앉아버렸고, 겉으로는 아주 미세한 물결 말고는 파도치지 않는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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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너무 깊은 나머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의 심연이 두렵다며 내 바다에서 헤엄치길 꺼려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파도 한 번 치지 않고 늘 고요한 나의 바다를 둥둥 떠다니며 그 잔잔함을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비밀을 내 바다의 깊고 깊은 심해에 숨겨두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내 바다는 늘 한결같았다. 그래서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데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내 바다가 넘칠 리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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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다에도 결국 끝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조약돌부터, 혼자서는 들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바위까지, 수천수백 개의 돌을 내게 던졌다. 퐁당, 하고 금세 사라지고 마는 돌도 있었지만, 풍덩, 소리를 내면서 여기저기 물을 튀기는 돌도 있었다. 내 마음의 표면에는 잔물결과 큰 물결이 번갈아가며 파란을 일으켰다. 내 마음의 가장 밑바닥, 심해에는 가라앉은 돌들 위에 끊임없이 새로운 돌이 쌓여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돌들은 드넓은 지평선을 채우고 보이지 않던 심연을 가득 메워버렸다. 내 바다는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 한계를 맞이했다. 사람들이 내게 던진 돌들은 끝내 해수면 위로 보일 만큼 높고 기다란 돌담이 되어 내 바다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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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이 넘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아마 육지에 새로운 바다를 만들어버릴 만큼 많은 물이 세상을 휩쓸 것이다. 눈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부숴버리는 세찬 물줄기가 사방으로 흐를 것이다. 고요한 바다 위를 떠다니던 사람들은 드높은 파도에 잠겨버릴 것이고, 심해에 숨겨져 있던 비밀들은 세상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다닐 것이다. 내 마음이 그랬다. 절대로 가득 채울 수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나의 바다가 결국에는 돌덩어리들로 가득 차버렸을 때, 아주 커다란 해일이 나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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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덮치려는 해일을 잠재우고 고요하던 바다를 되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물을 넘치게 한 돌을 전부 건져서 내다 버리면 된다. 조약돌이든, 바위든, 사람들이 함부로 내 바다에 던진 돌들을 전부 건져내고 바다를 벗어난 물들이 햇빛에 마르기를 기다리면 된다. 작고 매끈한 조약돌부터 주워보자. 무겁고 거친 돌을 섣불리 치우려다 그 울퉁불퉁한 표면에 손이 베이거나, 무게를 못 이기고 깔릴 수도 있으니까, 내 두 손으로 주울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어쩌면 그러는 동안 내 안에서 요동치는 해일이 그 커다란 바위의 모서리를 깎아버리거나, 내 손에 들어올 만큼 작게 조각내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돌담이 새하얀 모래사장이 되어 내 밑바닥을 채워버릴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나 큰 폭풍이 일고 거친 파도가 휩쓸고 다니는 덕분에 그 돌들이 부서지고 사라지는 걸 수도 있으니, 이제라도 바다가 넘친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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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요즘 매일매일 돌을 주워 내다버리고 있다. 당장 수면 위에 동동 떠있는 아주 작은 자갈돌부터 시작해서 며칠이 지나고 나면 내 주먹만 한 돌을 주울 수 있을 것이다. 이따끔씩 힘이 넘칠 때는 내 몸통만 한 바윗돌을 번쩍 들어 버리는 날도 있을 것이다. 너무 커서 도저히 들 수 없는 것들은 일단 내버려 두자. 바람에, 파도에, 풍화되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버려도 괜찮다. 언젠가 내 두 손으로 모든 돌을 내다버려 다시 태평양 같은 바다가 된다면, 그때 내 마음 위를 부유하던 것들을 다시 데려올 것이다. 내 바다가 다시 잔잔하고 고요해졌다고 속삭이며 이곳을 마음껏 여행해달라고 부탁할 거다. 누군가 내게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며 찾아온다면, 이젠 모래바닥만 남은 아주 갚고 깊은 나의 심해에 그것을 단단히 심어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돌이 날아와 내 바다를 흔든다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주울 것이다. 그렇게 내 바다를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