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다 뭐예요

<2020년 12월호>

by 성해인
세상에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야 하는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잔혹스러운 것은 ‘청춘’인데, 그 말뜻은 실로 잔인하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그 푸르른 허울 속에 갇혀버린 나의 스무 송이 꽃밭엔 검푸른 먹구름만이 가득하였다.

작년 12월, 그러니까 이때쯤의 일이다. 수능을 보기 전 살얼음판 같던 교실은 어느덧 우화를 기다리는 친구들의 열기로 북적였다. 두려움과 아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렘. 이런 다채로운 주제가 버무려진 아이들의 대화가 12월을 가득히 채웠다. 모두 어른에 대한 낭만을 한 움큼 품은 채 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모습이 제법 대학생 같아 보여 그들과 나눈 대화가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그렇게 노래를 불렀던 20대, 그 장조의 멜로디에 나 역시 나만의 낭만을 새기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꽤나 제멋대로였다는 생각이 든다.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막연한 다짐들만 주구장창 늘어놓았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에 어느 누구도 미래를 확정할 수 없었다. 다 같이 소망들을 얘기하다가도 결국 마지막엔 "다 잘되겠지 뭐~" 라며 얼랑 뚱땅 넘기기 일쑤였다. 무엇이 다가올지 몰라 찾아오는 설렘엔 두려움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럴 때면 그대로 그냥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현실을 보기 전, 맘껏 부풀린 이상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도 나름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교탁 위의 시계가 느리게 가는 것이 미웠는데, 아무튼 참 변덕스러운 때였다고 생각한다.



학교가 끝나면 홀로 저녁거리를 배회했다. 저녁 시간을 조금 넘기면 젊은 청춘들이 하나둘씩 그곳으로 모이는데, 그 순간 그 거리만큼은 세상 어느 곳보다도 신선한 기류가 형성된다. 그 분위기에 녹아들어 같이 그곳에서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이 당시 나의 소소한 취미였다. 그 틈에 낄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거니와 술자리를 현장 탐사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교복 입은 모습을 들키기 싫어 롱 패딩 지퍼를 턱 언저리까지 쭉 올리고서는 괜시레 날이 춥다며 온갖 핑계를 댔지만 수험생 할인을 받아 칠한 얼룩진 머리 탓에 금세 들통나고는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월이 찾아왔다. 스물의 새해는 우리에게 있어서 해방과도 같아, 왜인지 모를 자부심 같은 것이 마구 솟아났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견우가 그랬듯 눈을 있는 힘껏 부라리며 민증을 내밀고서는 최대한 으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거리를 활보했다. 모두가 우리의 젊음을 질투했다. 누구나 동경하고, 누구나 그리워하는 그 순간을 어느 누구보다 후회 없이 보내고 싶었다. 술 게임에서 져 술값을 계산할 때도, 술 취한 친구들의 주정에 온갖 진을 뺄 때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가로등 옆에 쓰러질 때조차도 난 청춘을 읊조렸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게임에서 져 안주값을 조금 더 낸다던가, 버스요금을 500원 더 낸다던가 고작 그것이 당시의 내가 지불한 청춘의 값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무언가 내 안에서 뒤틀림을 느꼈다. 그중 가장 나의 퇴화를 실감한 것은 바로 나의 마음에 있는데, 자극적인 것 외에는 모든 것에 감흥이 없어졌다. 혼자 음미했던 한 권의 책이라든지, 술 없이 이뤄졌던 조촐한 모임이라던지, 무언가를 하면서 느꼈던 보람됨. 그런 것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밤새 하루를 흥청망청 써버리다 해가 질 때쯤 겨우 일어나 "뭐해 술 먹게 나와" 메시지가 뜨면 "지금 갑니당" 하며 뛰어가는 게 전부였던 나. 어느새 그 생활을 일상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나의 삶은 망가져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청춘이라는 명분으로 '지금 아니면 언제 이래 보겠어'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여 오만 가지 생각에 휩싸였지만 항상 마지막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로 귀결됐다. 그 둘의 충돌은 어느 누구의 승리도 아닌 오롯이 나의 패배였다.


북극의 밤처럼 영원한 계절이 아닌 청춘은 언젠간 져버릴 시기라 너무 취해있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사라질 오로라와 밤하늘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이제는 청춘이 닳아버린 어른들의 값비싼 충고는 나의 무대뽀 돌진에 과속방지턱 역할을 해줬지만 그렇다고 나를 멈추지는 못했다.


청춘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이 밤도 결국 사라져 나의 머릿속에만 흐릿하게 남는다는 것도, 그래서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 두려웠던 난 오히려 더 소리치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지금 이 밤과 이 순간이 언젠가는 사라진다해도 당장 오늘 밤과는 거리가 먼 얘기라 생각했다. 친구들과 우정을 과시하며 이게 청춘이고 젊음이라 또 한 번 스스로를 외면하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혼자였다. 새벽 다섯 시의 지하철역, 홀로 어둠 속을 지나가는 열차를 바라보던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어리다는 이유로 허용되는 게 있듯 청춘이라는 이유로 허용되는 게 있는 걸까? 기저귀를 벗자 교복을 입었고 교복을 벗어던진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몰랐다. 더 이상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상념에 잠기다 보면 지하철을 다섯 차례 정도 지나치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부로 그랬던 것 같다. 아무도 타지 않은 지하철이 싫어서, 어쩌면 내가 기다렸던 건 지하철이 아닌 지하철이 들어올 때의 환한 전조등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즐거웠다. 분명히 즐거웠는데 왜인지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새벽의 즐거움을 진통제 삼아 흥청망청 써버린 뒤 찾아오는 허전함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어느새 날 깔아뭉갰다. 그 답답함과 허전함, 그 압박감을 청춘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그때부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며 초라한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어 모두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풍선처럼 덩치는 점점 부풀어 오르지만 그럴수록 속은 텅 비어있는 것만 같아 사람들 앞에 텅 빈 나를 보인다는 것이 무서웠다.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금방이라도 터져버릴까 봐.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전화번호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지웠다. 더 이상 "탕자의 삶을 살지 말자!"라는 멋진 다짐으로 포장했지만 사실 다른 누군가를 만날 용기가 없어 그냥 도망쳐버린 것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떠한 인사도 없이 난 그렇게 일방적인 작별을 고했다.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지는 않았다. 이기적인 것은 알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누군가와 멀어진다면 멀어질 각오도 했다. 소박한 졸업식을 마친 후 기약 없는 이별을 고하며 그렇게 학교를 홀로 나섰다.


젊다는 이유로 나의 모든 것을 용서했고 남들에게도 용서받길 바랬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한 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그저 용서받지 못한 죗값을 젊음이 사라질 때까지 미뤘던 것이었다. 그래서 혼자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참회했다. 그러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테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그럴싸했다. 친구들의 연락을 모두 거절한 채 그 시간을 나에게만 투자했다. 운동을 하고, 사색을 했으며 공부를 했다. 한두 번 연락을 거절하기 시작하니 먼저 오는 연락도 줄었다. 나에게 떳떳한 내가 된 후에 남들 앞에 나서고 싶었다. 매일 밤 거울 속에서 마주했던 내 모습은 부끄러웠지만 계속 이렇게만 한다면 이 부끄러움이 전부 사라질 줄만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이상해져 갔다.


나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시작된 이 도피는 점점 증오로 번져갔다. 그냥 너무 억울했다. 나의 청춘은 왜 이 모양일까. 영화 스물의 김우빈은 보기만 해도 파릇하고 건축학개론의 수지는 보기만 해도 꽃다운 청춘인데 난 왜 방구석에서 이러고 있을까. 나의 하루는 한없이 어둡기만 한데 왜 다른 이들의 청춘은 푸른 봄으로 보일까. 이따금 친구들의 희소식이 들려오면 비참해지는 나 자신을 더 견딜 수 없었다. 아무런 악의가 없는 그들의 호의를 뿌리치고 자격지심에 휩싸여 모두를 미워해야 했다. 누군가의 위로와 진심을 필요로 한 적도 있었지만 그 어여쁜 꽃가루들은 나에게 너무 과분하게만 느껴져 오히려 모질게 대했다. 모두를 등진 후 날 가두고, 더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해 공부에만 열중했다. 하루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심정으로 달렸는데 하루라도 비가 멎으면 모두 말라버릴까 봐, 내게 있어서 그것은 ‘종교’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12월이 찾아왔다. 나의 청춘을 버리고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면 결과가 보상해주겠지 생각하며 죽도록 매진했다. 지나가는 또래들이 무척 바보 같았다. 저들이 흥청망청 삶을 낭비할 때 난 ‘어른’의 삶을 살고 있다며 그들을 손가락질하였다. 그렇게 어른 흉내를 내면서 모든 것을 아는 체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모르는 체했다.


그리고 내 곁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혼자 숨어버렸다가 불현듯 나타나 바보 취급을 하는 애늙은이의 곁엔 아무도 남고 싶지 않아 했다. 이렇게 될 거라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대체 그 어린 바보들한테 난 무엇을 기대한 걸까.


그러자 눈앞이 막막했다. 난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모두를 등지고 다시 또 혼자만의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그 결과는 언제쯤 보상받을 수 있는 걸까? 5년, 10년? 남들 앞에 섰을 때 떳떳한 모습은 대체 어떤 모습을 생각했던 걸까? 친구들이 모두 젊음을 외칠 때 왜 난 그렇게 건조하게 대했던 걸까? 청춘이 대체 뭐길래 그런 고민들로 시간들을 보내야 했던 걸까? 다른 이들의 푸른 계절엔 예쁜 카나리아의 울음소리가 가득한데 난 왜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구슬픈 고동만을 불어야 했던 걸까.


내성적인 성격은 청춘과 거리가 멀다 여겨 억지로 웃음을 보이고 후에 찾아오는 괴리감에 생각이 많아졌던 그 밤들, 청춘예찬이라는 낭만을 져버릴 수 없다면 나의 성격을 바꿔야 하는 걸까 되내이며 나를 잃어갔던 무수히 많은 시간들, 스스로에게 보상받지 못한 생각에 참회하며 억울함에 사무치던 그 지랄 맞던 순간들. 여전히 이 모든 것을 짐처럼 여긴 채


유리창에 비친 나를 마주한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 속에 섬약한 내 모습을 바라본다. 그때 문득 나를 가둔 것은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청춘은 꼭 즐거워야만 하는가? 내가 생각했던 청춘의 장면은 사실 단편적인 순간이 아녔을까? 붉게 충혈된 나의 눈동자로 보든, 새 푸른 눈으로 보든 내가 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난 왜 그 청춘의 의미에 목을 매었을까. 청춘은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 하지만 항상 즐거울 수는 없는 거였다.


세상에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야 하는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잔혹스러운 것은 ‘청춘’인데, 그 말뜻은 실로 잔인하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그 푸르른 허울 속에 갇혀버린 나의 스무 송이 꽃밭엔 검푸른 먹구름만이 가득하였다.


라는 문장을 끄적이고 잠시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한다. 그리고 나의 한 해를 떠올려본다. 화창한 햇살은 없었지만 꾸준함은 있었다. 그 역겨운 생각들이 나를 되려 성숙하게 만들었다. 왜 즐거움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지 못했을까. 왜 청춘의 즐거움은 공허함을 동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 고되고 슬퍼서 죽어버릴 지경이었다. 화려한 꽃들을 바라볼 때 그 아래에 잡초가 된 것만 같아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난 아직 나의 계절이 오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라일락이 겨울에 피듯, 선인장이 사막 속에서 피듯 말이다. 나는 나만의 계절에서 나만의 꽃을 피우면 되는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위로를 끄적일 필요도, 남들과 나를 비교할 필요도 없다. 평생 행복할 수도, 그렇다고 평생 우울하라는 법도 없다. 내 기억의 파편을 퍼즐 조각처럼 짜 맞춰 완성한 내 기억 속의 나. 그 계절 속에서 만든 나의 인연들과, 나의 글, 나의 노래. 그 모든 순간이 바로 나의 계절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 마음속 먹구름이 조금은 개였다. 그 틈 사이로 내리쬐는 한 줄기 햇빛을 이제서야 겨우 마주해본다. 아 하늘은 이렇게 밝았던 거였구나. 햇빛은 이토록 따스한 것이었구나. 이제서야 조금씩 나의 계절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먹구름이 우중충했던 나의 스물, 나의 내년은 좀 더 화창해질 것이라 믿는다. 원래 비가 온 후 개인 하늘이 가장 맑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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