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Innocenti (인노첸티) : 이탈리아어로 '죄가 없는'의 뜻. 영어의 innocent와 동일한 의미. "버려진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음"을 나타냄
2. Annunziata (안눈치아타) : 이탈리아어로 '수태고지, 즉 마리아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할 것임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의 뜻. 영어의 announcement와 연관
2019. 05. 10(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2)
‘두 종류의 헤어짐, 그리고 재회’
다비드 조각상을 보고 두오모 꼭대기에 올라가서 피렌체 시내 전경을 본 뒤 인기 있는 먹거리 중 하나인 곱창버거(Lampredotto)로 배를 채웠다. (참고로 곱창버거는 왠지 니글니글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담백하니 시도해 볼만하다) 이후 체력을 보충한 김에 조토의 종탑까지 올라갔다 왔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이 조금 빠듯했다. 이미 오후 3시가 넘어갔었는데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일몰 보기 전에 스테이크도 먹고 장도 봐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해 르네상스 시대 회화 작품들이 즐비한 우피치 미술관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어느 tv 프로그램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조금 고민했지만 tv에서 봤던 그곳의 잔상이 굉장히 깊숙이 남아있었기에 과감히 우피치 미술관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이 건축물이 있는 곳은 ‘Pia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인데,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 한 일본 작품 <냉정과 열정사이>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영화는 아르노 강 범람(1966년)으로 인해 파괴된 많은 예술작품들의 복원 작업이 유행하던 1990년대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다. 미술품 복원, 피렌체 풍경 등 인상 깊은 요소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두 주인공인 아오이와 준세이가 오랜 헤어짐 끝에 이 광장에서 다시 만나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다.
두오모가 틈새로 보이는 재회의 광장 초입부 (출처 : 직접 촬영)
이곳은 영화 촬영 장소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두오모가 배경으로 보이기에 낭만적인 공간 같아 보이지만, 그 이면에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곳에는 16세기 중반 피렌체의 유력 가문 중 하나였던 그리포니 가문의 집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가문의 아들이 어느 여인과 결혼을 약속한 뒤 전쟁터로 나갔다가 목숨을 잃게 된다. 이를 몰랐던 약혼녀는 이 건물 2층에 살면서 항상 창문을 열어두고 약혼자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으며,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은 이후 두 연인이 죽어서라도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며 이 광장을 ‘재회의 광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오이와 준세이가 재회하는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장소와 얽힌 또 다른 헤어짐이 있다. 16세기 연인들의 이별 이전에 너무나도 가슴 아픈 ‘자식과 부모의 헤어짐’의 공간이기도 했었다. 두오모를 등지고 동상을 바라봤을 때 그 동상 오른쪽에 건물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내가 우피치 미술관을 포기하고 선택한 '인노첸티 보육원'이다. 카메라맨과 수많은 스태프들이 두오모가 보이는 아름다운 재회의 모습을 찍기 위해 등졌던 곳이 사실 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인노첸티 보육원의 정확한 명칭은 Ospedale degli Innocenti인데, 여기서 innocenti는 ‘죄가 없다’는 뜻으로(영어의 innocent와 동일) ‘버려진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음’을 나타낸다. 무책임한 부모에 의해 어린 나이에 길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참고로 이 건물은 두오모 꼭대기에 그 무거운 돔을 살포시 올려놓은 브루넬레스키가 15세기, 즉 600여 년 전에 설계한 건축물로 유럽 최초의 어린이 복지시설이다.
해당 시설은 피렌체 상인들, 즉 길드(Guild)라고 불리는 동업자 조합의 후원으로 세워졌는데, ‘버려진 아이들’을 돕겠다는 좋은 의도로 건축된 공간이기에 여러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 기증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Primavera(봄)> 그림으로 유명한 보티첼리가 그린 <Madonna col Bambino degli Innocenti(죄 없는 아기들과 성모 마리아)>도 있는데,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아무런 죄도 없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따뜻한 엄마의 품을 느낄 수 있도록 위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보티첼리의 유명한 작품 <비너스의 탄생>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다른 그림을 통해 더 큰 울림과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탈리아어로 ‘아기’를 bambino(밤비노)라고 하는데, 이는 미국 프로야구 MLB 팬이라면 다 알고 있는 ‘밤비노의 저주’로 유명하다)
이 시설에서 약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컸기도 했지만, 다른 관광지들과는 다르게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차분한 분위기에서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 대충 보고 넘어갈 수 없는 가슴 아픈 것들이 많았고, 그렇기에 여러 가지 생각과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이기도 했다. 특히 tv를 통해서 먼저 접했었던, 길게는 몇 백 년 지난 징표들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표식들이 담긴 통의 겉에는 아이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이 적혀 있었으며, 그 안에는 반쯤 잘린 동전이나 헝겊 쪼가리 등 나중에 만날 경우 알아볼 수 있게끔 징표가 보관되어 있었다.
1866년 12월 31일 Nerina
그런데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안눈치아타 광장의 명칭에서 annunziata(영어의 announcement와 연관)는 ‘수태고지’, 즉 ‘마리아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할 것임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로해주는 존재인 예수가 태어나게 됨을 알려준다는 의미의 장소인데, 오히려 사랑하는 연인은 헤어지고 죄가 없는 아이들은 버려지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기에 일단 밖으로 나왔는데, 인노첸티 보육원 앞에서 아버지와 볼을 차고 노는 아이들, 키스를 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연인들 등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 장소는 이미 언급했듯이 두오모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지만, 재회와 헤어짐 등 많은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촬영지구나’하고 사진 찍고 넘어가기보다는, 이 장소와 얽힌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한 번 잠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