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겪었다고 하는 어느 직원과 밥을 먹다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볼 살이 더 있었으면 좋겠고 그나마 괜찮은 데는 코인데..."
"다른 곳은 더 없을까요?"
"하체에 살이 더 빠졌으면 좋겠고 상체는 그에 비해 얇은 편이긴 한데 근육이 부족하고..."
솔직히 말해준 건 고맙다. 얼굴 중 마음에 드는 곳을 물은 건 아니었는데. 외모를 물은 건 아니었는데. '몸'이라는 개념이 쪼그라든 게 좀 서운했다. 하긴 씁쓸해 할 것도 없다. 마흔까지 뼈, 근육, 피부와 내장 등 온몸을 염증과 통증으로 도배 할 때 내게 '몸'이란 건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그런 몸뚱이를 걸친 '나'란 존재가 꼴보기 싫은 천덕꾸러기였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몸의 화재는 일단 진압 되었다. 겉근육을 느끼고 안으로 안으로 침투하면서 완전체로 대하기에 이르렀다. 헬스에서 필라테스로 움직임의 깊이를 더했다. 폴댄스와 플라잉요가로 예술도 덧칠했다. 내면에 기인된 몸으로서 소매틱요가와 이너마스터의 길도 내딛었다. 그저 걸은 것도 아닌 제각각 전문가의 길을 밟아 나갔다. 일상에 돌아와서도 모든 움직임들이 고스란히 삶으로 연출되었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는 장자 마냥 여기가 운동센터 인지, 일을 하는 곳인지 모르게 근육이 움직였다. 의식주 만큼이나 중요한, 근육을 의식해 주인노릇 하는 '의식주 운동'이 일상에 깊숙히 배었다.
몸은 '나'라는 정체성으로 둔갑해 일일히 신호를 보냈다. 그걸 알아차리는 나, 수정할 건 수정하고 느낄 건 느끼는 나로서만 존재했다. 내 생애 가당치도 않은 몸짓들을 해내고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부위들을 발견하면서 몸을 사랑하게 되었다. 내 안으로 들어갈수록 근육은 심장 보다 더 크게 뛰었고 관절은 더 넓게 한계를 뛰어 넘었다. 비록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전히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 몸은 그런 존재였다. 몸은 '나'이자 '삶'이었다.
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면서 나에게 그러하듯 남에게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내게 그러하듯 남을 향한 분노도 사그라들었다. 세상을 원망한 건 내 '몸'이 한 짓이었음을, 남이 내게 상처준 건 그의 '몸'이 한 일이었음을, 쓰러져 가던 몸을 세우고서야 바로 볼 수 있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 마는 살면서 시선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한 신체 부위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요한데 급하지 않은 일로 치부되는 독서, 글쓰기처럼 소중한데 존재감 없이 살던 몸구석을 전한다. 사람들 열광에 가리워진 곳. 홍보와 미용에 등떠밀려 그렇지, 그늘에서 묵묵히 제기능을 다해온 몸짓을 함께 느끼고 싶다. 그 어떤 여행지 보다도 장관이다. 그 아름다움에 때론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운동할 때 만이 아니다. 삶에서 숨이 드나들 때마다 느낀다.
형체로서가 아닌 기능을 다 하는 몸. 오십을 바라보는 몸이 되고서야 그렇게나 예뻐보일 수가 없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 당최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했었다. 내 몸에 콩깍지 씌이니 끼고 있던 색안경도 벗어 던진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집에 비해 옷이 턱없이 작지만 폴댄스에 심취한 몸, 작은 키에 곱추이지만 밸리댄스에 혼이 나간 몸, 파킨슨병으로 넘어지기 일쑤지만 에어로빅엔 진심인 몸, 백발과 주름살로 주름잡지만 팔다리 뻗을 때 만큼은 가장 소녀다운 몸... 내 몸 네 몸 할 것 없이 그 움직임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신체-마음-정신, 그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의 '몸'신상이 되었다. 몸이라는 존재론적 세계관에 하나 둘씩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반하는 세상, 이 세상 눈 감는 날까지 만들어 나갈 것이다.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줄까. '현존'하는 몸으로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하는 게 사는 이유이자 사명이다. OECD국가 자살률 1위, 우울증 100만 명 국가, 숫자를 달리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