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로 걷다
7시30분이 기다려졌다. 8시에 태양은 어둠 밭을 비집고 나오기 때문이다. 오후 네 시를 기약해 세 시부터 행복해지는 어린왕자가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행복한,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달할, 그리고 행복의 값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 맛을 본 후로 오십 평생 처음으로 천주교에서 말하는 '대림'을 느낄 수 있었다. 중천에 뜬 태양만 찬양 하다가, 성탄절만 기뻐 날뛰다가, 비로소 '기다림'과 '깨어 있는' 시간을 볼 수 있었다. 대낮과 상반된, 추위에 극도로 취약한, 내 몸을 덜덜 떨게 하는 시간이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6일차를 힘차게, 가뿐하게 열었다.
에스테야(ESTELLA)에서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21.1KM, 만만한 거리 거만함으로 출발!
저 멀리 치악산이 보였다. 강원도 원주길이 생각났다. 종이 위에 댄 돋보기처럼 내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 밑에서 30분간 부지런히 발을 놀리던 출근길이 떠올랐다. 그 생각에 걸음은 또 빨라졌다. 눈 앞의 일을 끝마치지 않고서는 잘 쉬지 못하는 성향, 차라리 다른 사람 쉬도록 혼자 짊어지고 끙끙대던 내 모습이 보였다.
하늘에서 벌어진 불구덩이는 땅으로 전염됐다. <대장간>이 나타났다. 수공예품 판매점인데 뚝딱뚝딱 만드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떨린 몸도 녹였다. 철판 자르는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주거래처 대장간 아저씨도. 산티아고길은 불똥이 튀어 구멍이 나 애처롭게 바라보던 아버지 옷을, 아버지가 더 오래 입지 못해 무게감 실린 내 옷으로 시선을 바꾸었다. 잡념도 많고 눈 앞에 물건도 많은데 딸랑 가리비 목걸이 하나 샀다. 악세사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짐이 늘어나는 게 싫었다. 인생의 주인이 되고픈, 더 이상 악세서리로 살고 싶지 않은, 짐을 내려놓고 싶은, 더 이상의 짐은 받기 싫은 욕망도 작용한 듯했다.
오늘은 생각쟁이로 시작해서 그런지 말끔히 씻어주는 곳이 나왔다. <이라체 와인샘>이었다. 수도꼭지가 두 개인데 하나는 물, 하나는 와인이 나왔다. 공짜에 눈이 뒤집혀 벌컥대면 곤란하다. 와인은 하루 일정량이 있었다. 다음 사람을 위해 적당히 마셔야 한다. 아니 도착이면 모를까, 이제 시작인데 어찌 부어라 마셔댈까 싶었다. 물 나올 줄 모르고 생수통만 괜히 채웠다. 알베르게 수도꼭지 물이지만.
이제 앞만 보고 가자. 여성 한 명과 남성 네 명(외국인 팀)이 내 앞에 가고 있었다. 왁자지껄 깔깔대는 통에 덩달아 좋아 뒤를 쫓았다. 엎치락 뒤치락, 앞서거니 뒷서거니. 마주칠 때마다 "올라, 부엔 까지노(안녕, 좋은 길 되세요)!"를 외쳤다. 근데 뭔 놈의 길이 피레네 산맥보다 가파르나. 위를 올려다 봐도 오르막 뿐 끝이 보이지 않았다. 까미노의 그 예쁜 길은 다 어디가고 동네 약수터 만도 못 할까.
바깥 풍경에 볼 게 없으니 시선은 내면으로 향했다. 과거가 걸음에 짓밟혔다. 지금쯤이면 한 해 농사인 성과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보고서 쓰다 막차 끊길 뻔 했지. 주말 사무실은 참 추웠어. 작년 이맘 때 갑작스런 질병이 찾아와 자존심이고 자존감이고 내리막이었지. 원인 병명을 못 찾아 10개월을 안 다닌 데 없이 헤맸었어.
바깥 풍경에 감탄해 사진 찍는 게 아니라 지난 날을 밀어내기 위함이었을까. 기존 것을 부정한 완전한 새로움일까. 길은 블랙홀이었다. 기껏 뜬 해가 도로 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웠다. 등에 누가 업힌 것 같았다. 아들이 생각났다. 몸이고 돈이고 삶이고 아들에게 짐은 되지 말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뭐 때문에 안 되고 뭐 때문에 버티는 현실세계 사람들, 돕고 싶은 신념이 까미노 화살표로 보였다.
아, 돕고 싶다 돕고 싶다. 근데 여긴 까미노 화살표가 왜 빨강인가.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앞서 나갔다. 아직은 '너나 잘하세요'인 것을. 가파른 오르막은 끝날 기미가 없고 내 앞 외국인팀은 한쪽에 멈춰 섰다. 간식을 먹겠거니 하고 앞질렀다! 주변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와인 공짜는 그렇게나 바글대더니 다들 속도 한 번 무지 빠르다고 생각했다. 내내 보이던 자전거 순례자도 보이지 않을 땐 오르막 때문이 아니라는, 수상하게 여기는 통찰을 기르자!
길을 잘못 들었다. 도로 내려가는 외국인팀의 뒤통수가 보였다. bar에서 아침 먹으려고 굶고 나왔는데 동물적 본능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지럽고 손이 떨렸다. 급한대로 가방 속 쵸쿄바로 성질을 녹였다. 이래서 아들은 내가 혼자 떠나는 걸 한사코 말렸다. 혼자인 엄마가 또 혼자 될까봐 맘에 걸렸던지. 세상은 역시 혼자가 아니었다.
이번 순례길에서 만난 70대 남성과 50대 여성이 내려왔다. 남이 잘못된 걸 보고 기뻐하면 안 되는데 중증 길치에겐 그들이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대기업 임원이었던 70대 분은 이 길을 네 번째 왔고 50대 분은 공무원 출신이라 바른 길로만 가겠거니, 그 뒤만 밟자. 혼자 걷기 좋아하는 나를 내려 놓자.
지나가는 외국인이 길을 안내 했다. 오던 길 말고 옆쪽 숲길이 지름길이라는 것 같았다. 화장실 급한 사람들만 들어갈 것 같은, 풀이 잔뜩 덮힌 옆길을 휴대폰 잡은 손으로 열어 제치며 걸었다. 얼마나 높으면, 구글지도는 먹통이었다. 이 길도 수상했다. 결국 옆길로 간 만큼 도로 와, 잘못 올라온 만큼 또 도로 내려갔다. 진정제 쵸코바, 하나 남은 금덩어리 초쿄바를 또 욱여 넣었다. 길은 다 통한다는 말, 귀는 받아들여도 마음은 튕겼다. 길은 최대한 덜 돌아가는 거라 되받아치고 싶었다.
어찌어찌 해 찻길로 내려왔다. 위험한 도로였다. 차들은 쌩쌩 지나갔다. 교차로 한복판에서 또 방향을 잃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날은 밝아오는데 아주 그냥 마음은 짙어만 갔다. '네 번이나 오셨는데 왜 길을 모르시나. 임원이라 비서만 두셔서? 여기서도 정작 구글은 내가 켜고 말이야. 공무원 분은 공자왈 맹자왈 세상 긍정적 말씀은 다 하는데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나....' 악마가 위장에 침입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웃자. 억지로라도. 에라 모르겠다. 지나가는 구급차를 세웠다.
내 상황도 응급이다. 긍정이 탈출한, 구급상태다. 멈춘 걸 보니 환자는 없는 듯했다. 스페인어 번역기를 돌려 길을 물었다. 질문은 했는데 정작 그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도로 한복판에서 순례자도 아닌 응급구조자에게 휴대폰 들이밀며 '잠시만요 여기다 대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실래요?'는 도저히. 그의 손짓과 눈빛을 대충 때려 맞춰 길을 나섰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올 때까지 그들 뒤를 혼자 따라 갔다. 회사도 아닌데 웃지 못할 상황에서 굳이 웃을 필요까지야. 한 줄로 가야하는 찻길이라 다행.
길을 잘못 드는 일, 평소에 얼마나 숱한 일이었던가. 하늘과 땅이 뒤집혀 보였다. 내 속처럼. 배가 고파 눈도 뒤집혔다. 드디어 bar가 보였다. 아침은 고사하고 출발 후 5시간 지나, 12시가 넘었으니 점심이다.
70대 분은 몹시 미안해 하며 점심 값을 냈다. 호밀빵샌드위치를 잡은 손이 괜히 부끄러웠다. 스페인 샌드위치는 소스 없이 날 것이다. 내 마음도 날 것이 드러난 듯했다. 그건 그렇고 너무 맛있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먼 산도 크게 보였다. 스페인산도 식후경! 세상 모든 게 용서됐다. 마을을 지나가며 벤치에 앉아 한 컷 찍는 여유까지 부렸다. 동물에서 인간 된 자, 그저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탓이로소이다'. 단순하고 쉬운, 이지(easy) 답다.
이제 안정권으로 진입 했다. 풍경 하나하나가 눈에 밟히니 자연과 함께 걷고 싶어졌다. 내 속도가 필요한 시간. 걸음 빠른 두 분을 먼저 보내드렸다. 길이 비슷비슷 해 감탄이 감퇴 될까 우려 했었다. 걱정도 팔자. 큰 건 큼지막한 대로 작은 건 아담한 대로, 색과 질감, 자연의 흔적은 모든 게 위로이고 안식처였다. 밭은 시원하게 등도 긁었다. 그 장면이 그 장면 같지만 한 걸음에도 다른 세상이었다. 볼 줄 아는 눈이 생기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이 되었다. 흙, 구름, 산, 색, 계속 달랐다. 인간도 그러하다. 헌데 길에 인간이 또 보이질 않네.
당초 예상보다 2시간 더 걸어 그런지 배가 고파 다리가 후들거렸다. 매일 들고 다니던 견과류 봉지를 꺼냈다. 하루견과처럼 매일 나눠 먹으려고 샀지만 한 줌은 무슨, 양이 안 차는데. 그늘 한 점 없는 여기서 화장실은 더 곤혹스러우니 물로 배를 채울 수도 없었다. 내일이고 모레고 없다. 소금 잔뜩 뿌려진 견과류 자반을 몇 주먹이나 입에 털어 넣었다.
드디어 길에 사람이 나타났다. 외국인 무리를 만났다. 내 맘이 네 맘, 내 '속'도 네 '속'이려니 견과류 봉지를 내밀었다. 한 주먹 크게 집어 가라고 몸으로 말했다. 화색이 돌면서 내 주먹이 더 크네 마네, 하며 한 움큼씩 가져갔다. 독일에서 왔다며 한국말로 고맙습니다를 물었다. 또 사진을 내게 보여주며 한국말을 알려달고 했다.
"다람쥐" 알려 주니 내가 그렇단다. '다람쥐'는 사무실에서 견과류 한 통을 순삭하는 걸 보고 직원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세상 보는 눈은 다 똑같구나. "견과류 먹고 행복한 근육 되세요" 독일어로 번역해 이두근과 함께 보여주니 빵 터졌다. 어딜 가나 개그도 다 통하는구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내 집이 최고다. 그렇다고 매일 먹던 또르띠야를 거를 순 없다. 광장으로 나가 저녁 겸 배를 채우고 바로 앞 <산타마리아 성당>을 관람했다. 빛과 예수님, 파이프 오르간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대성당의 웅장함에서 영적 감흥은 채워지지 않았다.
다리가 짧은 건지 돌고 돌아 그런지 삼성헬스는 4만4천보란다. 21km 구간에서 헤매길 잘 했다. 내일 30km 예습 잘도 했다. 길은 걸어온 인생길을 비추었다. 그림자처럼. 인생 디폴트는 역시 어둠이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이 증언했다. 어둠에 빛이 스멀스멀 들어갈 순 있어도 빛에 어둠이 비집고 들어갈 순 없었다. 빛이란 어둠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2층 침대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알베르게에서 견과류 독일순례단을 또 만났다.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방문 앞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어떠랴. 다운독 자세가 되는 천장높이인 것을. 고개를 꺾는 침대 1층도 아니고 엉덩이가 천장에 닿는 2층도 아닌데, 이거면 됐지. 이게 행복인 것을. 침대가 무지하게 삐거덕댔다. 최소 두 번 가는 새벽 화장실, 침대 소리와 흔들림을 최소화 하려면 사지에 힘 바짝 주고 오르내려야 한다. 뭐 어떠랴. 근육 자라는 소리인 것을.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성질도 돌고 돌아 헤맸지만 결국은 해피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