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상에서 걷다
8시에 출발 했다. 보아 하니 태양도 늑장이고 저녁 식당 문도 늦게 여니 보조를 맞췄다.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에서 로그로뇨(LOGRONO)까지 28.9km다. 길을 정 중앙으로, 딱 거기만 밟지 않는 이상 거의 30km인 셈이다. 7일차답다. 길다기보단 자치주(스페인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하나)가 바뀌는 데 의미가 있었다. '나바라 주'에서 '라 리오하 주'로 넘어 간다. 경기도에서 강원도든 충청도든 어디든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았다. 이젠 시간이 문제이지 역량이 문제인가.
어제 묵은 알베르게는 아침을 4유로에 제공했다. 호기심과 식탐, 장거리 신경안정제 삼아 식사를 신청 했다. 과일이나 요거트가 없고 이른 시간대라 그런지 여성은 나 혼자였다. 주변 모두 남성이었다. 종류별로 놓인 잼을 굳이 바르지 않아도 빵 자체가 꿀맛이었다. 내 앞 바구니를 자꾸 비우니 빵을 세 번이나 리필해 주었다. 비스킷도 야금야금 없애니 아예 두 봉지나 갖다 주었다. 이 정도 맛이면 마트에서 개당 2유쯤 될 텐데 뽕을 여러 번 뽑았다. 많이 먹을수록 가벼워지는 이 느낌 뭐지? 시작이 좋다!
어제 길에서 만난 <대장간>은 하늘에서 열렸다. 전기발전소를 지났다. 철선, 전기줄마저 예술이었다. 내가 너무 편파적인가 싶다가도 직접 보면 누구든 공정하다 할 터였다. 하늘은 30분 만에 <대장간> 문을 닫고 <와인 바>를 차렸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도 감흥 없던 내가 하늘땅 만남에 가슴이 떨렸다. 눈이 다리 대신 걸었다.
"언제나 우린, 웃을 수 있는~ "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노래가 절로 튀어 나왔다. '의무'와 '의식'에서 해방 된, 그야말로 '절로', 자연 그대로의 무의식을 느꼈다. 애쓰지 않음에 감격스러웠다. 이토록 호강하고 행복할 수 있음에 목이 멨다. 전반전을 뛰기도 전에 감성 속도위반을 했다.
혼잣말이 많아졌다. 범람 할 땐 글로 옮겼다. 언제부턴가 자연에 털어 놓고 있었다. 괜찮았던 게 괜찮지 않은 거였다. 길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이 길이 힘들지 않은 건 그 전에 힘이 많이 들었었던 거라고. 갑자기 이혼 후 밤마다 자전거를 탔던 장면이 '절로' 솟구쳤다. 퇴근 후 가면 벗고 동네산책로에서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끌었던 그때. 바람이 까스활명수였던 그때. 가면을 다시 쓰고 부모와 자식 앞에 섰던 그때.
길이 최면을 걸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10년 전 사진첩도 들췄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 잘 지내고 대학생 된 아들에 기뻐 날뛰는데 내 몸은 갑작기 와르르 무너졌던 작년. 집을 반석 위에 지었다는 나와 모래 위에 지었다는 신의 괴리였을까. 행복에 겨워 감사해 하며 살았는데 왜 몸 반쪽을 잃었을까. 떠오르는 생각은 나를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라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 이 길을 걷는 게 힘들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살아온 것보다) 힘들지 않다고 말할 것만 같았다. 염탐한 듯 구름이 마구 몰려 왔다.
내리막을 걷던 생각은 오르막 길로 향했다. 땅만 보고 가는데 발 앞에 5유로 지폐가 떨어져 있었다. 주워 고개 드니 바로 앞에 교회가 있었다. 세요(순례자 여권 도장)는 1유로였다. 주변 둘러 보니 때마침 발템포 맞은 사람도 다섯이었다. 5유로를 감사히 썼다. 우연과 기적 사이, 참 헷갈린다. 설마 신은 10유로를 받고 싶어 돈을 흘렸을라나. 참 헷갈린다. 뭐가 됐든 이미 이렇게 되리라는 걸 길은 알고 있는 듯 한, 심증과 물증 같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 <토레스 델 리오의 성묘 교회>는 12세기 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 팔각형 건물과 별모양 천장(칼리팔 스타일)이 나를 빨아들였다. 순례자들을 지킨 기사단(성 요한 기사단 등)도 관련 있었다. 대성당에서 느끼지 못한 울림이 있었다. 작은 게 위대하다는 나의 선입견 인지. 아무튼 갈 길이 멀다. 잽싸게 나갔다.
<라 리오하 주>는 스페인의 대표적 와인 생산지다. 포도밭 길을 예상은 했다만 서로 다른 존재로 '공존' 파노라마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몸을 녹였다 데웠다, 잠바를 입었다 벗었다, 바람과 산맥은 밀당 놀이를 했다. 포도밭을 일구는 트럭은 장난감 같지만 장난 아닌 풍경을 연출했다. 나무모자를 뒤집어 쓴 무덤도. '근묵자흑'이 아닌 '근초자노'가 될 지경이었다. 시골길은 막을 내리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빨간 스카프가 매달린 유네스코 거리를 지났다.
<비아나> 마을에 도착했다. 로그로뇨에 다 온 듯 한 아름다움, 다 걸은 듯 한 허기짐과 함께. 5유로 쉐어 멤버와 점심을 함께 했다. 난 또르띠야와 콩나물 같이 생긴 생선 들은 빵을 시켰다. 내가 먹을 몫과 별도로 쉐어 음식이 있어야지 각자 시킨 걸로 나눠 먹으면 위장은 끼니를 걸은 셈쳤다. 그래서 두 개 시켰다. 하지만 지나는 길에 빵집을 또 들렀다. 쿠키를 샀다. 금세 후회했다. 다른 맛도 더 살 걸.
함께 식사 하면 삶과 유머도 곁들이고 다른 음식도 맛 봐 참 좋다. 양이 차질 않는 게 문제였다. 다들 배가 불러 도저히 못 먹겠다고 했다. 내가 추가 주문하거나 다른 걸 더 사면 어김없이 맛을 봤다.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혼자 먹기 뭣 해 "(떨리는 목소리로) 드셔 보실래요?" 하면 손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쿠키도 배가 차질 않아 샀다. 두 여성은 배 불러 안 먹는다며 쿠키를 사러 들어가는 동안 밖에서 기다렸다. 쿠키는 문 밖을 나오는 순간 1/n로 공중분해 됐다. 나누는 게 예의인 자 vs 거절하지 않는 게 예의인 자, 그 사이에서. 그들은 평소 잘 나눠 주시는 분들이었다. 그래도.
순례길은 나눔의 길이라는데 나누면 배가 고픈데 그걸 느끼는 게 순례길인가. 먹는 걸로 옹졸해졌다. 속은 좁고 위장은 큰 게 민망했다. 이왕 쪼잔한 김에 한마디 보태면 그들이 나누는 삼겹살과 라면은 내가 먹지 않는 음식이다. 설마 나라는 인간, 혼자 걷는 걸 좋아하는 이유가 혼자 왕창 먹으려고? 음식도, 자연도 아주 배 터지게 왕창. 먹는 거 밝히는 인간, 길은 확실히 나를 증명 했다. 이성을 멀리한 죄, 본능을 곁에 둔 죄로 비아나 마을에 있는 <산타마리아 성당>에 들렀다. 하늘은 구름과자를 종합선물세트로 주었다. 24km 넘기니 <라 리오하 주> 표지판이 나왔다. 남은 5km, 1시간. 길이 예쁘고 색달랐다. 로그로뇨는 큰 도시답게 가히 달랐다.
언니들에게 남몰래 흑심 품은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발 담그는 물가에서 기다렸다. 안그래도 한 분은 무릎과 발톱이, 한 분은 발목이 좋지 않아 걸었다 쉬었다를 반복했을 텐데. 목 빼고 기다리다 등장하니 반가웠다. 좋다는 건 다 해 보자며 찬물에 발도 담갔다. 마음 때도 씻겼으리라. 로그로뇨 대성당이 저멀리 고개를 내밀었다. 마지막 건너는 다리, 우리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뭐든 잘 먹는, 호기심에 더 먹는 나. 로그로뇨에 온 이상 <타파스> 투어를 놓칠 순 없었다. 타파스는 바를 돌아다니며 맥주나 와인과 소량의 음식을 맛 보는 거다. 여러 맛 보기 위해 뭉쳐야 산다! 그 유명한 양송이 핀쵸 집부터 첫테잎 끊었다. 다들 장거리에 지친 데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먹는 걸 좋아해 많이들 못 드셨다. 기회주의자마냥 난 물 만났다. 음식 남는 꼴을 못 보니 더더욱. 먹을 땐 몰랐는데 내가 어지간히도 많이 먹었다. 자신을 돌아보려면 사진은 찍고 볼 일.
다들 배가 터진다며 배를 부여잡고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닭으로 만든 타파스가 궁금해 혼자 돌아다녔다. 꿩 대신 닭, 닭 대신 새우. 끝내 못 찾아 새우 타파스를 골랐다. 새우깡 위에 계란후라이를 얹은 듯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배가 부른데, 그래도 맛있다. 외국인들은 둘이 하나 시켜 음료와 음미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하나 끝내고 이 집, 또 하나 끝내고 저 집, 하이에나처럼 여기서도 성과보고서를 쓰는 나와는 결이 달랐다. 혀를 내두르며 먹방 유튜버를 보는 것 같다, 는 순례 어르신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씻지도 않고 저녁부터 먹고는 밤 9시가 다 되어 들어왔다. 다들 잘 준비 모드인데 난 그때 샤워를 했다. 늦은 시간 보일러를 잠그는지 물이 뜨뜨미지근 하게 나왔다. 내 성질과 반대로. 갈수록 냉랭한. 뜨끈한 물로 근육을 지져도 부족할 판에 먹은 열량으로 몸을 호호 불며 씻었다. 닭 쫓던 몸, 내 몸이 닭이 되어 그냥 끝냈다. 배 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더럽지만) 배 부른 순례자가 나으니.
로그로뇨 대성당 근처에서 축제를 했는지 밤새 떠들석했다. 알베르게 안이나 밖이나 무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침 5시면 눈이 떠졌다. 알베르게는 아침 6시에 활동 개시 한다. 다른 순례자들 수면을 위해. 로비로 나와 앉았다. 졸지에 축제로 밤을 꼴딱 샌 젊은이들을 맞이하게 됐다. 알베르게 현관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올 수 있는데 내가 주인마냥 타이밍 딱! 그들은 취기 서린 소리로 어디서 왔느냐며 들떠 있었다. 타파스 투어로 달덩이가 된 내 얼굴도 상당히 들떠 있었다. 내 나이를 묻길래 대답하니 비슷한 또래로 봤단다. 취기가 있으면 좀 어떤가. 그 말에 내가 취하는데.
오늘은 마지막 5km 남은 구간에서 성시경 노래가 떠올랐다. "때로는 이 길이 멀게만 보여도, 서글픈 맘에 눈물이 흘러도~~" 아침에는 느닷없이 강수지 노래가 터지더니. <두 사람> 가사가 순례길에 찰떡이다. 1시간 남은 길이 버거웠다. 그 마지막 한계를 넘지 못해 포기하고 산 건 또 얼마나 많을지. 포도밭 길, 그래도 '선'이 참 고왔다. 최진석 교수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인문학이라 했다. 자연이 그리는 무늬, 그 '선' 상에 삶이 있었다. 선이 고운 사람이 되고 싶다.
결과론적 선(善) 말고 의도가 선(善)한 사람
씨앗 자체가 선한 사람,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