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월 말~12월 초 이야기
2004년도 7월, 조금 늦은 스물여덟살 나이로 입사한 회사.
2021년 올해로 17년 하고도 넉달을 더 채우고 드디어 부장이라는 직위로 진급을 하게 되었다. 차장 진급은 늦었으나 운빨 인맥빨로 좋은 보직을 일찍 차지할 수 있었고 다행히 보직 업무가 적성에 매우 잘 맞아 좋은 평가를 받게 된 덕분에 남들보다는 조금 일찍 부장이라는 직위를 달 수 있었다. 역시 열심히 일하는 자는 즐겁게 일하는 자를 이길수 없다는 옛말이 딱 맞는 케이스라 하겠다.
승진 기쁨도 잠시. 진급을 했으니 직급(부장)에 맞는 보직을 받아야 한다. 남들은 진급하면 그걸로 1,000% 행복한거고 보직은 주면 주는대로 받는거지 뭘 고민하냐고들 하지만, 막상 닥쳐봐라, 진급만 시켜주면 아프리카 땅끝도 시베리아도 단 걸음에 달려갈 거라고 호언장담을 할테지만 진급 하고나서 갈 수 있는 자리가 눈에 보이면 그게 또 말이 달라진다. 아무튼, 올라갈수록 갈 수 있는 자리는 매우 좁다. 물론 그 중에서도 요직이며 좋은 자리는 선배들 몫이지, 갓 진급한 신참부장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나는 본사에서 진급했으니 본사에 남기를 바랬다. 그도 그런것이, 본사 이전과 함께 분양받은 아파트가 바로 코앞에 있거니와 아들 딸 마누라 가족 모두 한 집에 같이살고 있으며, 축복스럽게도 그 집이 회사에 걸어갈만한 거리에 있어 타고다니던 차까지 처분한 상태라 본사 떠나기가 싫었다. 어느 누가 따뜻한 집에서 다닐 수 있는 직장을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상황이 썩 그리 좋지 못했다. 새로 오신 사장님께서 구두지시를 내렸다고 하셨다. 진급자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모두 사업소로 발령내서 폭넓은 경험을 쌓고 오게 하라는.
우리회사는 상명하달이 칼처럼 잘 시켜지는 회사다. 사장님 어명이 있었는데, 나 하나 구제해주고자 "특별한 사유"를 만들어서 나를 본사에 남겨 줄 인사담당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자연히 사업소 여기저기 보직자리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또 다행히 친분이 있었던 몇 사업소장님들로부터 사업소 부장자리를 제안받아 보직경쟁에서 완전히 낙오할 걱정은 조금 덜었다.
어딜 가나... 마음이 갈팡질팡 하고 있는데, 그 주 금요일 늦은 시간에 해외사업처 주무차장으로부터 해외사업 파견 또는 해외투자회사 전출 희망자를 급히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받았다.
갑자기 머리속에서 계산회로가 빨라졌다.
어차피 시간이 가면 본사에 남을 "특별한 사유"가 없으니 사업소로 발령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사업소를 가게 된다면 1)살림도 쪼개야 하고(주말부부 또는 월말부부. 나는 장거리 운전 정말 싫다.) 2)차도 새로 사야하고(이 시국에? 조금만 더 있으면 성능좋은 전기차가 쏟아져 나올텐데?) 3)어차피 애들하고 부대껴 살기도 글렀다(떨어져 사니까).
사실 주말부부(라 쓰고 월말부부라 부른다.)는 처음이 아닌게, 차장으로 진급을 하고 처음 발령받은 곳이 자가용으로 5시간, 대중교통으로(환승시간을 최고로 잘 맞추면) 7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로 발령을 받아 2년간 떨어져 산 적이 있어 주말부부의 생활이 뭔지 너무 너무 잘 알고있는 상태였다.
"아니, 어차피 떨어져 살거면 돈이나 많이 벌고 새로운 경험이나 쌓고 오면 좋은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드니, 해외 파견쪽으로 마음이 급격히 기울었다.
문제는, 내가 가고싶다고 덜컹 받아주냔 말이다. 나름 정보원을 총 가동해서 해외 사이트별 경쟁률을 확인해보았다. 역시, 예상한 바대로 인기가 많은(인프라가 좋고 잘 사는) 나라는 이미 내정자가 찜 되어있는 상태여서 섣불리 지원했다가 망신만 당하고 내정자로 이름이 도는 선배 부장한테 찍혀서 직장생활 꼬이기 딱 좋게 보였다.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랜다고, 내가 정말 간절하게 지원해야만 하는 사유라도 있으면 만들어서라도 해보겠는데, 평생에 해외사업이라곤 해본적도 없고 그 쪽 네트워크도 없는데 언감생심이다.
전략을 바꿨다. "그럼 제일 인기없는 곳이 어디지?" 답은 앞에서 이미 얘기했다. 인프라가 열악하고 못사는 나라. 덤으로 주변국과 사이가 안 좋아서 전쟁, 테러 위험이 상존하는 나라. 그 나라 국민들께는 죄송하지만 파키스탄 사업장은 예로부터 인기있는 지역이 아니라서 공모자가 미달되는 경우가 과거에도 종종 있던 지역이었다.
파키스탄 공모보직 자리는 총 3자리가 있었다. 사업개발법인장, 운영사업법인장, 운영사업지사장. 나는 이왕 해외경험 해 보는 것, 조금 힘들고 난관이 있더라도 법인장을 해보고 싶었다. 우리회사 사장님과 호칭이 헷갈려서 “법인장”으로 부르지만, 실상은 작은 회사라도 "사장" 아닌가. 뭐가 좀 잘못되더라도 죽이지야 않을거고 내가 언제 사장 직함을 달고 근무를 해 볼 것인가. 근데, 내가 사장되면 잘 할 수 있나? 모르겠다. 일단 지원해보자.
집에 와서 마누라하고 이런 저런 발령배경과 내 희망을 얘기했다. 해외 나가면 해외수당도 담뿍 준다는 말도 곁들여서. 여차하면 휴직하고 같이 나가도 살아도 되고, 애들한테는 국제학교를 다녀보는 남들과 다른 소중한 경험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같이. 설득이 되려나 반신반의 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당신 하고픈대로 해. 뭐 언제는 당신이 집에 들어왔어? 똑같은거 같은데 뭘." 하고 얘기를 했다. 사실 그랬다. 특히 올해 진급을 앞두고 본사 차장보직 중 제1서열 보직이라는 곳에서 근무를 하면서 낮이고 밤이고 주말이고 거의 회사에 살다시피 일하며 살았다. 가끔 어느날은 새벽에 들어갔다 새벽에 나오다보니 "당신 어제 들어오긴 했어?"라고 물어보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뭐 어차피 집안일은 신경안쓰고 회사일만 하는 사람이니 돈도 더 벌고 하고픈거 하고 오랜다. 아무튼 그렇게 마누라하고 협상도 마쳤다.
주말 내 파키스탄 수력발전 운영사업법인장 지원서를 썼다. 영어 손 놓은지가 한참인데 영어성적도 제출해야하고 업무계획을 영어로 작성해서 발표까지 하랜다. 아, 시작부터 쉽지가 않다. 아무튼 영어 에세이도 구글 번역기 돌려서 대충 그럴싸하게 마무리하고 지원서 작성을 마쳤다. 화요일 오후까지가 지원서 마감이었는데, 괜히 먼저 지원해서 전사에 구설수 오르기가 싫어서 지원서를 쥐고만 있었는데, 화요일 오전에 급히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부장님. 해외사업, 관심있으시죠? 이번엔 파키스탄 수력발전 운영사업지사장으로 지원해보는게 어떠셔요?"
"헉, 그걸 어찌알고. 저 사실 운영법인장으로 지원해볼까 해서 지원서를 준비하고 있던 찰나입니다. 그냥 법인장으로 지원해볼게요."
"아니 그게... 법인장은 이미 후보자가 있다는 썰이 있구요, 지사장은 전국에서 공모자가 없을 것 같아 걱정이래요. 미달되면 여러모로 골치아픈 일이 벌어질 수 있대요."
내막을 들어보니, 법인장 지원했다간 낙점될 가능성도 커 보이지 않았고 되려 물만 흐릴 판이었다. 누군지 밝힐수는 없지만, 핵심요원의 조언이니 그 말대로 하거나, 해외 파견자체를 포기하거나.
처음 마음먹은 것과는 좀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 부장 첫 보직인데 지사장이면 국내에서 사업소장 자격 아닌가? 그것만 시켜줘도 황송하지. 그렇고 말고. 그렇게 생각하니 금방 또 수긍이 되었다. 파견 국가가 바뀌는것도 아니고, 발령 이후에 강등되는것도 아니고, 뭐 잃을게 없는 장사 아닌가. 아직 젊은데 법인장 하고싶으면 지사장 해보고 난 이후에 다시 해도 되겠지 뭐.
그렇게... 그날 점심시간에 부랴부랴 긴급하게 지원서를 지사장 지원내용에 맞게 바꾸고, 공모지원서 마감 10분을 남기고 제출했다.
결과는? 단독지원. 지원낙제점을 겨우 통과하는 합격.
그렇게 나의 첫 부장보직 직함 및 발령지가 정해졌다. "파키스탄 000 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