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01
내가 가을을 타는 걸까. 아니면 아이들도 가을을 타는 걸까.
지난 주말엔 두 아이들을 앞두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몇 번 참을 인을 그려내다 아이들앞에서는 차마 티를 낼 수 없으니 그냥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러버렸다. '악, 그만해'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날 힘들게 한 것.
첫 번째. 밥.
오전에 마트를 다녀왔는데 시식코너에서 잡채를 나눠줬다. 두 아이 모두 너무 맛있게 먹어 (심지어 둘째는 리필까지..) 어쩔수 없이 사게 되었다. 원래 점심을 마트에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첫째가 잡채밥이 먹고 싶다고 보채길래 집에 오자마자 장바구니 정리도 못한 채 열심히 잡채밥을 만들었다. 그런데 아무도 잡채밥을 먹지 않는다. 밥을 먹지 않아 간식을 못 준다고 하니 그때부터 훌쩍거리다 이내 징징거리는 첫째. 둘째도 덩달아 같이 떼를 쓴다. 불어터진 잡채밥은 식탁에 덩그러니 놓인 채, 양쪽에서 서라운드로 울어댄다.
두 번째. 화장실.
잡채밥은 그래도 참을만 했다. 허겁지겁 나도 밥을 먹고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 "엄마. 화장실에 갈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미리 말을 한 채 들어갔으나 잠시뒤 문을 벌컥 여는 첫째. 둘째도 화장실에 들어오려고 한다. "엄마 나 쉬마려." 첫째가 쉬 마렵다는 소리에 급하게 첫째를 들여보내려고 하는데 둘째가 화장실 문 밖에 딱 버티고 서서 문도 잘 열리지 않는다. 엉엉 우는 둘째를 어떻게 밀어내고 첫째의 급한 볼일부터 보게 한다. 둘째는 내가 나올때까지 서럽게 또 운다. (화장실이 하나라 나도 서럽고 내 볼일도 제대로 못 봐 그것도 속상하다.)
세 번째. 잠
주말이라 재미있어서 그런지 둘째가 도저히 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빠가 재우려 1차 시도 했으나 실패. 두 번째 타자인 내가 들어가서 재우려는 순간 울기 시작하는 둘째. 앙앙 울던 것이 나중엔 땀을 흘리며 악을 쓰고 운다. 안아서 진정을 시켜보려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우는 둘째. 물도 먹여보고 좋아하는 인형도 줘보고 수면등도 켜보는데도 나가자고 바깥만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첫째도 방으로 들어와 자기가 거들겠다고 하는데, 언니를 보는 순간 다시 또 나가자며 난리치는 둘째. 첫째는 혼자 있어 무섭다고 하고, 둘째는 떠나가라 울고. (남편은 외출해 없고) 가슴이 답답하고 갑자기 여기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들어 속으로 '악' 하고 소리를 질러본다. 심호흡으로 내 마음을 좀 진정해보고 첫째에게 잠깐 아이패드로 사진을 보라고 하고 (유일한 영상 시청시간) 둘째에게 물 한 잔 먹이고 문을 닫고 자장가를 다시 틀어주었다. 이내 잠이 드는 둘째. 첫째도 종이접기를 조금 하더니 피곤했는지 금새 잠이 든다.
잠든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워서 방금 소리없는 비명을 치고 곤두박질 했던 나의 기분이 민망스럽게 느껴진다. 육아는 내 기분을 바닥으로 떨어지게 했다가 또 어느 사이에 하늘로 올라가게 한다. 조울증에 걸리면 이런 기분이려나. 그렇다면 난 육아 조울증에 걸린 것 같다.
얼마전 만난 친구에게 엄마와 나의 육아일기에 대해 말을 했더니, 그 엄마의 그 딸이라며 너의 다정함이 어머님을 닮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그런가?'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다정한 엄마를 보고 자라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은 이렇게 어딘가 화가 많은 부족한 엄마다 나는. 여름의 열기와 기분 좋은 날씨에 몽글몽글한 이야기만 쓰다가 오랜만에 날것의 육아일기를 써 본다.
1989년 9월 29일
+ 그나저나 소련이라는 단어를 보다니... 새삼 엄마의 육아일기가 오래되었음을 실감한다. 전국체전같은 소식을 육아일기에 쓰는 엄마를 보며 어릴 적 볕 좋은 거실에서 신문을 펼쳐보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