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에서 한 달 넘게 남편과 24시간 붙어있기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랑 연락을 했다. 한국은 황금연휴 기간이라 다들 들뜬 느낌이다. 지금 벨기에 상황은 어떤지, 신혼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이런저런 질문들이 오갔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이라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꽤 빡센 신혼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24시간 함께 : 남편의 재택근무 & 나의 온라인 수업
3월 13일 처음으로 락다운 조치가 시행되고, 남편은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나의 유일한 스케줄이었던 어학원 수업도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장 보러 가는 것과 운동하는 걸 제외하고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 함께 있게 되었다. 밖에 나가더라도 커피숍이 문 닫아 있으니 들어갈 곳도 없고 공원 벤치도 전부 앉지 말라고 경고문을 붙여놓았으니, 딱히 할 것도 없다.
* 10평 스튜디오 : 우리의 보금자리
유일하게 문이 있는 공간이라고는 화장실과 벽장. 오롯이 혼자의 시간을 즐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화장실 가는 것뿐. 집에 있는 유일한 책상은 남편의 업무 책상이자 나의 공부 책상이자 우리의 식사를 책임지는 식탁이 되었다. 집에 있는 서랍장도 저게 전부. 정말 자주 쓰는 것만 서랍장에 두고, 나머지는 벽장(남편은 드레스룸이라 부르는) 안에 전부 넣어놓았다. 각자 방이 있는 삶을 30년 넘게 해 온 두 사람이 방이 없는 공간에서 함께 산다는 게 참 쉬운 일은 아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친구들에게 신혼 수련회 온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에게 딱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답답했던 1주일
처음 1주일이 가장 답답했던 것 같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으니 남편이 일을 하면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반대로 내가 집안일을 하면 남편도 함께 집안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편하게 앉아있지를 못했다. 같은 공간에 있으니 항상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일 할 때도 같이 일하고, 쉴 때도 같이 쉬고. 그렇게 생각하니 항상 상대방의 동태를 살피게 되고, 함께 있어도 자꾸 '뭐해?'라고 물어보게 되었다.
남편은 재택근무를 하며 일을 하지만 나는 휴직 중이라 딱히 하는 일이 없다. 그 날의 가장 중요한 일이 장보는 일 정도? 집안일은 해도 티도 별로 안 나고 성취감도 뚜렷하게 나는 일이 아니라서 집안일만 하는 나의 모습에 괜히 스스로 위축되고 자존감도 낮아지는 것 같았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하고 한 번 퇴사를 하고 나서도 바로 공부하고 이직하고, 딱히 쉼표라고 부를 만한 기간이 없이 지금까지 쭉 달려오기만 해서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나의 유일한 업무인(?) 집안일도 남편이 훨씬 더 잘해서 이래저래 자존감만 낮아지기 시작했다. 남편도 부모님과 같이 살고, 나도 부모님과 같이 살아와서 우리 둘의 살림 실력이 비슷할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워홀 및 기숙사 생활로 다져진 남편의 살림 스킬은 웬만한 주부 부럽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도 깔끔해서 부모님이랑 살 때보다 오히려 남편 눈치를 더 보게 되었다. 벨기에 와서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먹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원래 성격은 드러나는 법. 에어 팟을 세탁기에 돌리고, 열쇠를 잃어버리고(진짜 잃어버리지는 않았고 바지 뒷주머니에 있었다), 핸드폰 액정을 깨뜨리는 등의 여러 사건을 겪은 후에 나의 덜렁거리는 모습을 편하게 남편에게 덜밍아웃했는데, 이미 남편은 이런 나의 모습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며 이러저러한 사건 후에도 시종일관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 집안일도 습관과 같아서 일단 몇 날 며칠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킬이 생기게 되었다. 낯선 공간, 낯선 사물들이 익숙해지면서 내 공간, 내 물건들이 되고 그제야 비로소 내 손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 같다. 청소하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이런저런 집안일들이 몸에 배어 처음만큼 힘들지 않다.
강제 공유를 통한 이해
'도대체 공대 박사는 연구실에서 뭘 하는가?'를 한참 동안이나 이해하지 못하던 나였는데, 어깨너머 남편이 일 하는 모습을 보니 평소에 어떤 식으로 연구를 진행하는지 조금 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회의를 해서 회의 내용은 전부 다 알 순 없지만 남편이 말하는 모습을 보며 '버스트 시그널, 렐루 값, 머신러닝, 딥러닝' 등의 연구 용어들도 기억하게 되고, 동료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일 할 땐 저런 모습이구나' 혼자 훔쳐보기도 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나와 달리, 오늘 별 일 없었냐는 나의 물음에 늘 '별 일 없었어.'하고 대답했던 남편의 모습도 처음으로 이해가 갔다. 매일매일 업무가 마무리되고 한 달 사이클로 돌아가는 내 업무와 달리, 남편의 일은 몇 개월 혹은 몇 년을 바라보고 준비해야 하는 성격의 일이라 나처럼 매일 해 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한테 데이터 값의 변화를 일러줄 순 없으니.... 그냥 별 일 없다고 대답하고 말았겠지.
단어도 무작정 암기를 하다 보면 갑자기 이해가 되고 외워지듯이, 남편의 음악 취향, 업무, 취미 등도 강제로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즐기게 되었다. 반대로 남편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 음악, 습관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남자들이 노래방 가면 잘 부르는 소위 '노래방 인기 차트'를 정말 싫어하던 나였는데, 어느새 인트로만 들어도 '응급실, Don't cry, 가시' 임을 알고 따라 부르게 되었다. 남편이 열심히 하는 'Rise of kingoms'의 연맹 상태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고, 'Overcooked 2'를 깔아서 같이 게임을 하기도 했다. 드라마를 잘 안 보던 남편은 나의 추천으로 함께 '종이의 집'을 보기 시작했는데, 시즌 2에서 그만둔 나와 달리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시즌 4'도 열심히 보고 있다. 근처 빨래방에 빨래하러 갈 때마다 1화씩 보고 온다.
모든 걸 똑같이, 함께 할 필요는 없다.
남편이 일 하면 나는 집안일을 하고, 각자의 노동 정도를 비교하고 꼭 똑같이 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꾸 나도 모르게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되고, 집안일만 하는 내 모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위축되었던 것 같다. 같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 함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똑같이 할 필요도 없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여기에 남편은 일을 하러 온 거고, 나는 휴직을 하고 쉬기로 한 거기 때문에 일부러 없던 일을 만들어서 남편이랑 똑같이 무언가를 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목적이 다른데 당연히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럽은 다시 쳐다보지도 않아도 될 정도로 신나게 여행을 다니려던 나의 제1의 목적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무참히 깨지는 바람에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처럼 맥이 빠져있었다. 집안일을 하는 것도 이전에는 주업이 아닌 부업 같은 느낌이었는데, 락다운 이후엔 꼼짝없이 나의 주업이 되었다. 뭔가를 하려고 해도, 여행 빼고는 딱히 생각해 본 것이 없어서 하고 싶지도 않았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집에서만 갇혀 지내야 하는 내 모습에 짜증이 났다. 그래도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순 없기에 내가 하면 즐거운 일을 찾아서 하나둘씩 하기 시작했다. 비록 대면 강의는 아니지만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어학원 수업도 열심히 듣고, 매일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일기도 쓰고, 작지만 확실한 성취감을 위해 요리도 하고 있다. 음식을 하고 그 모습을 짧게나마 기록을 남기다 보니 매일 무언가를 한다는 성취감에 뿌듯해진다. 당연히 해야 하는 집안일도 기록을 남기고 새롭게 해 보려 노력하다 보니 덜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일상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남겨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에 작은 일이라도 조금씩 하다보니 줄어들었던 자존감도 올라가고 지금 상황에 대한 답답함과 무력감도 줄어들었다.
무슨 일이든 꼭 둘이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남편이 게임하면 나는 내 컴퓨터로 넷플릭스를 보고..... 각자 좋아하는 걸 하며 쉬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남편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즐기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취향이라는 게 존재한다. 가령 나는 꽂히는 노래가 있으면 질릴 때까지 한 곡만 반복해서 듣는데, 남편은 금방 지겨워한다. 그 자리에서 킹덤을 정주행 한 나와 달리, 남편은 좀비물은 징그러워서 1화도 보지 못하고 꺼 버렸다. 부부라고 해서 그리고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꼭 모든 걸 같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각자 취향을 강요하다가 부딪히는 것보다는 각자의 시간을 인정해주는 편이 낫다. 내가 재미있어서 같이 하자고 제안한 일을 상대방은 억지로 할 수밖에 없고(사랑하는 사람이 하자고 하니까...), 그러면 심드렁한 상대방의 모습에 괜히 속상하고, 애써 시간을 할애해 함께한 상대방은 괜히 욕만 먹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처음엔 약간 서운할 수 있어도 각자 상큼하게 쉬는 시간을 즐기면 된다.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더더욱 각자의 힐링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릴 적 수련회를 마치고 나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으나(오히려 친구들과 몰래 밤새고 노느라 더 피곤했던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 했던 추억은 확실히 남았던 것 같다. 락다운도 거의 끝을 보이고, 우리의 신혼 수련회가 끝나고 나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 길이길이 남을 추억이 생길 것 같다. 어떤 신혼부부가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남편 혹은 와이프와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 함께 하겠는가. 그간 나는 식당과 카페가 전부 문을 닫으면서 강제로 한 달 넘게 매일 요리 실습을 하며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했고, 방 청소도 잘 안 하던 사람이 매일 집안을 쓸고 닦으며 깔끔한 새댁으로 거듭났다. 남편도 24시간 아내가 지켜보고 있는(!) 살벌한 업무 환경에서 연구를 진행했으니, 앞으로 어떤 상황이 와도 굳건하게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것이다. 더군다나 함께 붙어 있었던 이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았으니 수련회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