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리가 곤란한 것들에 관해...
다시 또 여름이 찾아왔다.
사실은 진작 왔지만, 뒤늦게 하는 여름 옷 정리다.
지난 겨울 내내 옷장 안에 잠들어 있던 여름 옷들을 하나 둘 꺼내 살펴보는데,
눈에 띄는 원피스 하나가 있었다.
슬림핏 피케 원피스.
날씨가 더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가 하나 둘 꺼내 입었던 반팔 티셔츠들과는 달리,
한 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도 출격을 못하고 잠자코 대기 중이기만 한 나의 원피스다.
그냥 생각 없이 놔두면 여름을 지나 다음 가을과 겨울까지도 옷장 안에 그대로 있을 원피스인데...
올 여름도 이 원피스를 꺼내 입을 일은 아마 없지 싶다.
이 녀석이 바깥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좀약을 벗삼아 옷장 안에서만 산지는 3,4년쯤 됐다.
코로나가 창궐해 여행도 심지어 카페조차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던 그 시절, 남편과 나의 유일한 놀이터는 집 근처 프리미엄 아울렛이었다.
지금은 비록 옷장 안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녀석의 출신지는 바로 거기다.
대개 우리 부부는 아울렛에 가면 조경이 잘 돼 있는 주변을 산책하거나 적당히 매장들을 둘러보다 먹거리 정도만 사오는 편인데, 이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편도 나도 각자 입을 옷을 하나씩 구입했다.
바로 이 원피스!
녀석은 코로나가 끝나고 내 몸무게가 50Kg에 진입하면 휴가지에서 입을 작정으로 내가 야심차게 구입한 일명 쇼부후쿠(勝負服)다.
나는 보자마자 입어보지도 않고 이 녀석을 구입했다
왜냐. 안 맞을 게 뻔했으니 입어볼 필요도 없었다.
보통은 안 맞으면 안 사야 맞지만, 이 날은 사실 안맞는 옷을 일부러 샀다.
당연하다. 살 빼면 입을 옷이니까.
물론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와, 슬쩍 내 몸을 구겨 넣어보긴 했다.
다행히 옷이 들어가지도 않을만큼 작은 건 아녔다.
그렇지만 온몸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슬림핏이다 보니 숨길 수 없었던 올록볼록 내 몸의 귀여운(?)엠보싱들.
그럼 뭐 어떤가.
어차피 나는 살을 뺄 거고, 녀석은 살을 뺀 다음에 입을 예정이니 문제될 게 없었다.
어디선가 살 뺀 후 입을 옷을 사다 방에 걸어두면, 다이어트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본 것도 같았는데...
'녀석을 방에 걸어두지 않고 옷장 안에만 넣어둔 게 문제였나? 그래서 녀석이 심술이 나 나의 다이어트를 방해했나?'
다이어트는 여지없이 또 실패했다.
이쯤이면 다이어트란 건 실패하라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고, 그게 다이어트인가 싶기도 한데...
암만 노력을 해도 앞자리가 6에서 5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66의 여자사람이다.
그 탓에 3,4년이 흘렀지만, 선발투수로 영입한 이 녀석을 마운드 위로 호출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 옷도 유행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이제 나도 어쩐지 무릎 위로 올라오는 원피스는 신경이 쓰여 못입는 나이가 됐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는 입어도 치마는 어쩐지좀 부담스런 요상스런 아줌마가 바로 나.
그러니 대충 또 입으면 입을 수 있는 이 옷도 딱히 손이 안 가, 여전히 녀석은 옷장 안 그대로다.
그래서 고민이다.
1. 일 년만 더 노력해서 내년에 제대로 입는다.
2. 여태 못 입었음 내년에도 못 입을 옷, 당근 한다.
3. 예쁘게 입어줄 친구에게 선물 한다.
4. 이도 저도 다 귀찮다. 그냥 버린다.
사실 입을 일도 없을 것 같고 옷장 안에 자리만 차지하니, 처리를 하는 게 맞긴 하다.
그런데 차마 그냥 버리는 건 못하겠다.
녀석은 그냥 옷이 아니라 의미가, 마음가짐이 담겼던 옷이라서다.
마치 이건 웬만해선 다시 쓰일 일이 없는 예전 노트들, 편지들, 사진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데... 그래서 조만간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선물한다 쪽으로 마음이 거의 기울다…
'아 근데 나는 작아서 못 입는 옷을 그 친구는 너무 커서 못 입으면 어쩌지?'
또또, 괜한 걱정이 앞선다.
내 눈대중이긴 해도 그 친구와 나는 대략 한 사이즈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다가 그 이상 차이가 나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좀 겸연쩍을 것 같은데…
그러다 불현듯 이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말고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에게 줄까?‘
녀석이 나에게 온 이유, 그러니까 이 옷을 구입한 본래 취지부터 생각해보자.
녀석은 <다이어트에 성공한 후 입을 옷>이었다.
그러니 본래 취지대로, 내가 꼭 아니더라도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이 입는 게 맞다.
그러면 3,4년을 옷장 안에만 있던 녀석도, 세상 밖으로 나와 바깥 구경이란 걸 할텐데…
다이어트 성공하고,
36 사이즈 (55) 라코스테 슬림핏 피케 원피스
예쁘게 입을 수 있는 여성분 어디 없나요?
참, 좀전에 유행이 지났다고 했던 말은 취소할게요.
피케 티도 그렇지만 피케 원피스도 스테디셀러인 건아시죠?
텍 같은 건 없지만 세탁 한 번 안하고 넣어만 둔 새 원피스 입니다.
임자 찾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