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각자도생 여행 준비 .
개인적으로 나는 MBTI는 믿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한 번 슬쩍 '알아볼까?' 하기도 했지만, 시도만 하다 말았다.
설문에 진짜 나를 투영한다는 느낌보다, 내가 되고싶은 나를 반영하는 느낌이라 불신이 스멀스멀.
'에이 이런 건 알 필요도 없고 알고싶지도 않아' 그랬는데...
그래놓고 이해를 돕는다며 쥐똥만큼 아는 MBTI로 말문을 여는... 맞다. 그 얕고 얍삽한 인간이 바로 나다.
서론이 길었다. 본론 같은 거 없고 바로 결론으로 넘어가면,
이번 여행은 P인 남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하고 준비한 여행이다.
그리고 J인 나는 결혼하고 처음, 남편 하나만 믿고(?) 멀고 먼 호주로 향했다.
* 토보이 : 78년생 아내. 토실한 남자 아이 같다고 남의편이 지어준 별명.
* 똥보이 : 77년생 남편. 토보이에 대한 보복, 아니 보답으로 내가 똥 잘 싸는 남편에게 지어준 별명.
결혼하고 8년. 신혼여행이었던 괌을 빼면 주로 우리가 간 곳은 일본 아니면 동남아다.
똥보이가 직장인인 탓에 휴가를 길게 낼 수 없었던 것도 이유지만, 그보단 나의 멀미와 장거리 비행에 대한 공포가 늘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그 탓에 호주는 물론이고 미국도 유럽도 가본적이 없는 나. 덩달아 못간 똥보이.
우리는 주로 가깝고 편한 일본만 찾았다.
결혼 전 나는 잠시 일본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한 경험이 있다.
그 덕에 약간의 일본어가 가능하고, 일본이 익숙하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모든 여행의 기획부터 준비는 내가 다 했다.
똥보이는 여행 일정을 알려주면 회사에 월차를 내고, 비행기 안에서 내가 작성한 입국 신고서를 따라 적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나를 따라 먹고 즐긴 것밖엔 딱히 한 일이 없.........
(사실 가자고 하면 단 한 번도 반대하지 않고 따라 와 준 것만도 고맙긴 하다.)
"그러니 이번엔 당신 차례야. 내가 한 것처럼 당신도 좀 해봐. 나는 따라만 다닐 거야."
그래서 이번 호주는 전적으로 똥보이에게 맡겼다.
내가 일본이라면 똥보이는 호주. 그는 젊어서 호주 시드니에서 어학연수를 한 경험이 있다.
그게 근 20년 전 옛날옛적 이야기라곤 해도, 뭘 해도 나보단 낫겠지 싶은 생각에 믿고 맡긴 건데...
"오빠, 여행 카페 보니까 서리힐즈 거기가 그렇게 좋다던데? 우리도 거기 가는 거지?"
"(금시초문인냥 눈을 반짝이며) 아 그래? 거기가 어딘데?"
"(끄응)"
똥보이야 강산이 두 번 변한 탓을 하고 싶겠지만, 그는 역시 파워P였다.
그에게 전적으로 여행을 맡겼다간, 느낌따라 고고 날씨따라 고고가 될 게 뻔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후로도 여행 계획을 짜지 않았다.
그 흔한 시드니 지하철 노선도 한 번 제대로 훑어본 적 없고, 숙소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시내까지는 어떻게 가는지, 출발 당일까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이번 여행만큼은 그가 해주길 바랬기 때문... 인 것도 맞지만,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나에겐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가는 장거리 장기 여행.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은 다름 아닌 똥과 멀미였다.
언제 어디서건 스스럼없이 화장실에 잘, 그것도 자주 가는 똥보이에 반해, 나는 집밖에선 화장실에 잘 가지 못한다.
뭐 급하면야 집이고 뭐고 상관없이 싸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싸는 거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붙어있는 한, 나는 집 밖에선 큰 일을 보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나는 그 일이 있고 나면 바로 샤워를 해야하는 사람. 그러니 바로 샤워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선 웬만하면 화장실에 가질 않는데...
보통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기니 크게 문제될 게 없지만 문제는 여행지에서다.
물론 일정을 나서기 전 해결하거나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해결하는 쪽으로 내 몸을 유도하긴 한다.
방법은 별 게 없다. 그냥 더 먹어 밀어내거나, 참거나 둘 중 하나.
그런데 밀어내기에 실패해 그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일정을 도는 날은 일정 중 밀려오는 변의로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맛있는 걸 봐도 사먹지 못하고, 근사한 걸 봐도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여행이 될 리 없다.
그리고 그렇게 참다가 도리어 변비같은 불상사를 맞기도 한다.
그럴 땐 가끔 시도때도 없이 잘 먹고 잘 싸는 똥보이가 얄밉기까지 한데...
'하. 저 인간이 내가 쌀 똥을 다 싸고 있네.'
안다. 말도 안되는 억지다. 그런데 그만큼 우리 부부 사이엔 대변의 격(?)차가 심하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런 게 하나 더 있다. 멀미다.
똥보이는 열 몇 시간을 타도 끄떡없는 사내인 반면, 나는 심한 멀미러다.
어려서부터 여행만 가면 악세서리처럼 귀 밑에 키미테를 붙혔고, 시간에 관계 없이 이동수단을 가리지 않고 흔들리는 건 다 멀미를 한다.
심지어 어떨 땐 균일하지 않은 내 집 거실 바닥을 밟을 때도 어지럽단 생각을 한다.
이렇게 된 건 작년 이맘때 뜻하지 않게 찾아와 호되게 앓았던 이석증 탓이 크다.
원래도 멀미러에 비행기 안에서 앞서 걷던 승무원의 등판에 냅다 오바이트를 뿜을 뻔한 연약한 여자지만, 이석증을 경험한 뒤론 재발이 두려운 나약한 여자까지 돼버렸다.
여기에 비행기 이착륙시 귀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는 항공성 중이염, 최근 불거진 난기류 이슈까지.
맞다. 사실 나는 비행기를 타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것치곤 또 여행을 너무 좋아한다.
그러니 이런저런 위험과 걱정도 잊고, 특가 항공권만 보면 홀린 듯 티켓팅을 해버리는 건데...
그 다음부터가 걱정 또 걱정이다.
특히나 이번 목적지는 장장 10시간 30분 거리의 멀고 먼 땅 호주 시드니.
내 걱정은 공포로까지 커졌다.
'멀미가 와도 10시간, 다리가 저려도 10시간. 그걸 참고 버티다 공황이라도 오면 어쩌지?'
'게다가 최근 난기류도 심하다는데, 그 공포는 또 어떻게 하고!'
사실 여행이 임박해오자 똥보이는 전에 없이 설레어 보였지만, 나는 불안 초조 공포에 내가 왜 이 여행을 간다고 했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이런 와중에 내 걱정의 반에 반도 모르는 똥보이는,
"별 거 아냐. 그냥 주는 밥 먹고 영화 몇 개만 봐도 금방 지나가."
"난기류? 안 죽어 안 죽어. 그리고 남편이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야. 안 그래?"
'누가 죽는 게 무섭대! 난기류 때문에 멀미할까봐 그런 건데...'
나는 남의 속도 모르고 쉽게 떠드는 똥보이가 내심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똥보이는 시드니 맛집만 찾고, 나는 난기류 관련 기사들만 검색하며 각자도생의 여행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주문한 적 없는 택배 하나가 집으로 배달돼 왔다.
"여보 뭐 택배 시킨 거 있어? 이게 뭐야?"
"벌써 도착했어? 그거 토보이 네 거야. 내가 어디서 봤는데, 비행기 타면 귀 아픈 사람들 귀마개 끼면 훨씬 낫대. 그냥 알려만 주면 토보이 넌 그냥 집에 있는 귀마개 가져갈 것 같아서, 내가 주문했어."
택배 박스 안엔 비행 중 기압 차를 줄여준다는 특수 귀마개 한 셋트가 들어 있었다.
"아 그리고 집에 코감기 약 있어?
"그건 왜?"
"귀랑 코가 다 연결돼 있잖아. 그래서 그런가 코 막힌 데 먹는 약이 귀도 뚫어준다는데? 그리고 그거 먹으면 잠 온대. 차라리 멀미 하면 자는 게 나아.“
'아니 그럼 시드니 정보 대신 내 귀앓이 검색을 했던 건가?'
시드니 여행 까페에 가입만 해도 알 수 있는 핫플 서리힐즈(Surry Hills)는 몰라도, 비행용 귀마개는 아는 남자라니. 내심 똥보이가 멋있고 고마웠다.
(서리힐즈 대화 때 "대체 당신 여태 찾아본 게 뭐야?" 같은 말은 생각만 하고 안했던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사진은 남편 똥보이의 말을 듣고, 내가 챙긴 호주 여행 준비물들.
멀미약으로는 24시간 효과가 지속된다는 일본 국민 멀미약 <아네론>을, 코감기약으론 약국에서 추천해준 <액티피드>를 챙겼다.
그리고 내 비장의 무기, 똥보이가 사준 무려 2만원 짜리 비행용 귀마개.
나는 이 세 가지를 신줏단지 모시듯 기내용 파우치 안에 넣어, 마침내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랐다.
* 참고로 멀미약과 코감기약은 모두 항히스타민 성분이 포함돼 있어 함께 복용하는 것을 금한다고 해요.
* 저는 멀미약만 복용했고, 귀앓이 대처는 귀마개와 껌을 씹고 하품을 하는 걸로 대신 했어요.
* 귀마개의 효과는 완벽하진 않았으나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