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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보이 Sep 10. 2024

특공대원 같은 호주의 세관원.

집에선 남의 편도 나가면 내 편.  

항공업계에는 장거리 비행과 관련해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논란 하나가 있다.


Q. 이코노미 좌석의 경우,

좌석을 뒤로 눕히는 사람이 잘못일까? 아니면 그걸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잘못일까?  


1). 좌석을 뒤로 눕히는 사람

2). 그걸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


여행에서 돌아와 인터넷을 찾아보고 안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2번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뒤로 젖힐 수 있게 설계된 좌석을 뒤로 젖혔다고 해서 뭐라고 하면, 그건 권리 침해라는 건데...

이실직고 하자면, 나는 시드니행 비행기 안에서 2번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을 두고 <프로 불편러>라 불렀다.   

 



여행 D-day 출발 4시간 전, 우리는 이미 인천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나와 똥보이의 좌석이 떨어져 배정된 것을 변경하기 위해, 서둘러 이른 체크인을 했는데…

결과는 이날 비행기가 만석인 관계로 불가.

결국 똥보이와 나는 한 블럭이나 떨어진 자리에 따로 앉아 가야만 했다.그리고 하필 내가 앉은 자리는 4열 좌석의 중간 자리였다.

체크인 카운터만 가면 좌석 변경이 가능할 줄 알고 Seatguru.com에서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의 좌석 배치도를 미리 보며 야무지게 좌석까지 찜해뒀던 나는...  다 소용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비싼 티켓을 사던지, 아니면 좌석이라도 미리 구매해 두는 게 나을 뻔 했다.

스카이스캐너를 돌려 운좋게 찾아낸 여행사+외항사 조합의 항공권은 가격만 기특할 뿐,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24시간 무료 좌석 지정도 안돼, 일행과 붙어 가는 것도 안돼, 심지어 바뀐 탑승구 안내도 우리는 받지 못했는데...

우리는 면세 구역을 돌다 무심코 본 안내 전광판에서 탑승구가 변경된 사실을 알았고, 부리나케 달려가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아니 근데, 탑승구가 변경됐으면 안내 방송이라도 해줘야 되는 거 아냐? 우리야 운좋게 알았지만, 지금도 모르고 있는 사람 태반이겠어. 이거 이러다 출발 지연될 것 같은데??"


그런데 웬걸. 탑승은 도리어 십 여분 먼저 시작됐고, 비행기도 제 시간에 출발했다.

이 사실로 보아 둘 중 하나다. 항공사에서 예매한 사람들만 따로 문자 안내를 받았던가, 아니면 안내 방송은 했으나 우리만 듣지 못했던가.

다음부터 그냥 웬만하면 항공권은 항공사에서 직접 구매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우리는 무사히 탑승했고 비행기는 지연 없이출발했다. 그랬으니 여기까진 나이스~

그런데 문제는 그 직후 일어났다.

승무원이 나누어주는 입국신고서를 받아 미리 작성을 해두려고 내가 앞좌석 등받이 테이블을 펴는 순간, 앞좌석이 뒤로 밀리면서 내 무릎에 퍽! 하필 그 순간에 앞좌석 사람이 등받이를 뒤로 젖힌 거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저기요!"


물론 놀라기도 했고 기분도 썩 좋았을리 없으니 말투까지 공손했다곤 주장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나는 '저기요'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다음도 조금만 앞으로 당겨주십사 부탁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순간 최근 들어 본 가장 날카롭고 짜증나는 목소리가 내게 되돌아왔다.


"아 왜요? 뭐요?!"


그리고 뒤이어 일행인 듯 보이는 옆자리, 옆옆자리 세 모녀가 동시에 나를 노려봤다.

그 기세에 눌러 미처 뒷말을 잇지 못한 나. 그러곤 괜히 혼자 속으로만.…(궁시렁궁시렁)


'흑 나도 저기 남편, 아니 내 편 있는데........'


사람들은 지적한 사람을 프로 불편러라 부른다. 그런데 정작 열 시간 남짓 불편하게 앉아 간 건 결국 나였다.

젖힐 수 있게 설계된 좌석이면 젖히는 게 맞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뒷좌석 사람이 심각하게 불편하면, 그건 권리를 넘어선 민폐... 아니냐며, 나는 그 앞에선 차마 못한 말을 비행기에서 내려 다시 만난 남편에게 쏟아냈다.


"아, 아까 내가 자리에 갔을 때 말하지 그랬어. 그럼 내가 한 마디 해줬지. 대체 누구야?"


그래도 다행였다.

똥보이가 맞는 말을 한답시고, 원래 비행기에선 좌석을 눕히는 게 정상이니 뭐니, 불편하면 너도 그러지 그랬냐고 했으면 내심 속상할 뻔 했는데...

똥보이는 그래도 내 편. 그러지 않았다.  

(남편들은 알아두시라. 아내는 맞말 하는 남편보다, 내 편 들어주는 남편을 더 원함.)

    



그런데 그것만 빼면 비행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야간 비행이라 탑승 후 처음 주는 기내식은 먹지 않았고 잠을 청했는데, 딱히 잠을 잔 것 같진 않다.  

눈은 감고 있으나, 속으론 계속 '지금이 몇 시쯤일까' '어디쯤 왔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힘들게 참고 버티면서도 시계를 보지 않은 이유는, 시간을 봤는데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았으면 실망이 클까봐서다. 그러면 남은 비행 시간이 더 지루하고 힘들까봐, 애써 나는 시간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쯤이면 제법 왔겠지 싶어 처음으로 모니터를 본 순간 <남은 비행 시간 3시간 15분>.


'와, 벌써 7시간이나 왔다고?'


속으로 나는 쾌재를 불렀다.  

지금껏 내가 타 본 최장 거리보다 조금 더 멀리 와 있었고, 3시간 15분만 더 가면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뭣보다 걱정했던 난기류.

일본 해상을 지날 때, 그리고 적도를 통과할 때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봤는데, 기체가 컸던 덕일까, 비행기가 좌우로 흔들리긴 했어도 심하게 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다.

도리어 나는 조금씩 난기류가 있을 때마다 '아, 일본해상인가 보네!' '아, 적도를 지나는 건가?'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비좁고 불편한 자리. 오랜 시간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있는 게 조금 고역이긴 했지만, 아프거나 고통스럽진 않았으니 이 정도면 100점 만점에 99점!

앞으론 더 멀리는 못가도 최소 열 시간 남짓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이상하게 오랜 비행에도 불구하고 몸은 피곤하지 않았다.   

 

비행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볼 수 있다는, 시드니 공항의 상징물.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시드니 국제공항.

오랜 비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기쁨도 잠시, 이번엔 우리에게 <비행에서 살아남은 자, 입국 심사를 통과하라>의 미션이 주어졌다.     

시드니에 가기 전 여행 카페를 통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호주는 약과 식료품 반입에 까다롭다."

누구는 모르고 가져간 삶은 달걀 하나에 벌금을 300만원이나 냈다고 하고, 누구는 처방약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하는데...  

우리는 남들이 했던 것처럼, 남들의 조언을 참고삼아, 우리가 가져갈 약과 식료품의 리스트를 꼼꼼히 만들어 소지했다.

심지어 표지에 조금이라도 고기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다 뺐고, 말로는 설명이 불가한 식료품의 경우는 이미지를 그대로 번역해 영어로 표기된 사진을 따로 캡쳐해 두기도 했다.  

  

미리 핸드폰에 번역해 저장해 뒀던 사진들.


아니나 다를까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심사장 안으로 들어서자, 입이 쩍 벌어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동시간대 착륙한 세계 각국의 비행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입국심사장 안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는데…

길게 늘어선 대기줄의 사람들. 저마다 손과 어깨에 들려있는 가방들. 여행에 대한 기대감보다 긴장감으로 상기된 얼굴들.

그리고 그 사이를 표정 없는 무뚝뚝한 얼굴의 호주 세관원들이 탐지견 한 마리를 앞세워 지나다녔다.

얼핏 보면 입국심사 줄이 아니라 피난민, 피난줄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우리는 과연 저 문을 통과해 자유(?)의 땅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이때 눈 앞으로 성큼 다가온 세관원 한 명이 똥보이에게 손을 척 들이밀었다. (신고서 이리 내!)

그리곤 건네받은 신고서와 우리를 위아래로 잠시 훑곤,


" Your Wife?"


그 말에 똥보이 대신 대뜸 내가 나섰다.  


"We are Family!"


"당신 아내야?"

"우린 가족이야!"

이건 아내가 맞다는 소리인지 아닌지. 사실 따지고보면 좀 이상한 말이긴 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1차 통과. 저리 가 있으라거나, 따로 따라 오라거나, 똥보이와 내가 생이별 같은 걸 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똥보이 옆에 찰싹 들러붙어 한몸인냥 다른 대기줄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이번엔 마치 영화에 나오는 특공대원처럼 큰키에 다부진 몸, 조각처럼 잘 생긴 젊은 세관원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는데…


"Medicine?"

"Yes!"


그러자 훈남 특공대원 두 말도 않고 바로,


"EXIT"


특공대원이 손으로 가르킨 그곳엔 우리의 해방구, 탈출구가 있었다.

세관원은 "출구"라고 한 말이겠지만, 나에겐 "탈출"이라고 들린 그 한 마디. "EXIT"

마침내 우리에게도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이제 진짜 시드니다!!!


* 참고로 준비해 간 상비약 리스트나 사진 같은 건 꺼내지도 않았어요. 그저 묻고 답하고 끝! 있는 건 있다고, 없는 건 없다고 제대로 신고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인천공항 입국심사보다 복잡할 뿐이지, 어렵진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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