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레지던스는 처음이지?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현재는 신혼->권태기 부부지만 그 전엔 호캉스(?)부부였다.
말 그대로 호텔 숙박을 취미로 즐기는 부부.
*여기서 호캉스란? : 부대시설은 물론 조식 제공도 안되지만, 깨끗하게 씻고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비즈니스 호텔에 숙박하며, 그 일대 맛집이나 핫플을 즐기는 부부의 주말 나들이를 뜻함.
때는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2020년 경이다.
우리는 신혼집으로 얻은 부천의 17평 구축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그때만 해도 차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윗집 욕실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욕실과 붙어있던 침대방도 벽장 안이 전부 곰팡이로 변해 버렸는데...
'집에서 잘 수 있는 공간이라곤 그 방이 유일한데, 곰팡이와 동침을?!'
모르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괜히 부쩍 더 심해진 똥보이의 비염도 그 탓인 것만 같아, 한 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곰팡이에게 집을 내어주고 우리가 향한 곳은 서울 역세권에 위치한 비즈니스 호텔.
때마침 코로나였고, 서울 중심가에 잘 나가던 호텔들도 외국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방들이 남아돌던 시기다. 명동, 을지로 일대 웬만한 비즈니스 호텔들이 박 당 7,8만원, 그것도 감사하지만 여기에 각종 쿠폰에 카드 할인까지 받으면 단돈 5만원에도 하루를 잘 수 있던 시기였는데...
'오호라 이것도 모르면 모를까, 완전 신세계잖아???'
첫 호캉스는 윗집 누수로 불가피한 피신이었지만, 그걸 계기로 저렴이 호캉스의 맛을 알아버린 우리는 그 뒤로도 종종 서울 곳곳의 비즈니스 호텔들을 돌며 호캉스를 즐겼다.
(집에 에어컨을 틀면 그게 더 저렴하겠지만) 한 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를 핑계로 가고, (안쓰면 0원이겠지만) 할인율이 높은 쿠폰을 그냥 날리는 게 아까워서도 가고, (안 싸우면 갈 일도 없겠지만) 싸우고 나면 화해를 하러도 곧잘 호텔에 가곤 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은 '저렴이 호캉스'로 글이라도 써볼까 생각할 만큼, 우리는 웬만한 비즈니스 호텔 체인들은 안 가본 데가 없는 부부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흔히들 가는 펜션, 콘도, 레지던스 형 숙박 시설은 거의 가본 적이 없는데...
그 첫 경험을 드디어 이번에 호주 시드니에서 해봤다.
물가 비싼 호주에서 일주일 남짓한 제법 긴 시간이라, 처음엔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도 생각했지만, 요모조모 생각한 끝에 우리가 선택한 곳은 공항 인근 호텔형 레지던스 체인, "메리톤 스위트 마스코트 센트럴 (Meriton Suites Mascot Central)"이다.
첫째. 외식 물가가 비싼 호주인만큼 하루 한끼 정도는 숙소에서 해먹을 수 있어야 했다.
둘째. 그러니 호텔보다는 취사가 가능한 레지던스나 에어비앤비가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셋째. 암만 해도 개인을 상대해야 하는 에어비앤비보단, 기업형 레지던스가 우리 스타일!
다섯째. 그래서 찾아본 데가 호주의 호텔형 레지던스 체인, 메리톤 스위트이다.
여섯째. 그런데 시내 중심이나 고층 시티뷰로 유명한 지점들은 가격이 상당했고,
일곱째. 결국 우리는 시내 이동이 다소 번거로운 대신 공항 접근성이 좋은 마스코트 역으로 숙소를 정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합리적인 가격+생각보다 번거롭지 않은 시내 이동(어디든2,30분 이내)+편리하고 깨끗한 시설+마트 등의 주변 인프라가 매우 만족스러워, 우리는 다시 시드니에 가도 또 이곳에 묵기로 했다.
처음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치고 우리가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 설레고 좋았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재아줌들만 안다는 예전 TV 프로그램 <러브 하우스>의 빽뮤직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 했다. 똥보이도 나도 들어서자마자 이구동성으로 한 첫 마디가
"와! 우리 집보다 넓고 좋은데?"
뭐 물론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도착하자마자 할 첫 마디는 "아, 그래도 역시 집이 최고야!" 일테지만...
어쨌거나 이때는 내 집의 익숙함 보다 숙소의 새롭고 낯섦이 멈췄던 심장을 뛰게 하는 느낌이었다.
통창으로 둘러쌓인 침대, 거실 밖 베란다에 놓인 테이블, 주방에 크고 묵직한 원형 식탁...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다.
주방에 있는 큰 원탁에 앉아 호주산 청정우를 배불리 구워 먹고, 베란다 테이블로 나가 요거트에 싱싱한 과일과 커피로 내일 아침을 맞을 생각을 하니... 먹지 않았어도 이미 내 마음의 배는 가득 불러왔다.
그랬건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 아니 여행이다.
똥보이가 머물렀던 20년 전과 시드니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철저히 고객이 돼 인솔자인 남편 똥보이를 따르기로만 했는데, 첫 일정부터 인솔자가 헤매는 상황이라니. 그렇다고 고객인 내가 '에이, 이럴 거면 인솔자 바꿔!' 할 수도 없고...
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인솔자의 뒤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졸졸 따라 다니며, 다음 안내 사항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이렇게 가끔 도촬도 하면서)
그런데 직행인 줄 알고 탄 트레인은 갑자기 가다 말고 회차를 했고 (그래서 이리저리 헤매다 환승을 해야했고), 예전 좋았던 기억의 식당은 이제 관광객만 찾는 맛집이 되어 버렸다.
나야 조금 번거롭고 실망한 정도지만, 20년이 훌쩍 지나 자신이 알던 시드니를 잃어버린 똥보이는 이런저런 회한에 잠기는 듯 했다.
그래도 첫 날 일정으로 잡은 록스마켓에 도착했을 땐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개면서 시드니가 감추고 있던 본 모습을 드러내 똥보이도 나도 도로 기분이 좋아졌는데...
"와 저 하늘 좀 봐. 파란 하늘 맑은 공기. 그래 시드니는 이거지! 이게 시드니야!"
그런데 또 느닷없이 우르르쾅쾅!!!!!
하늘 말고 내 배에서 천둥 소리가 났다.
전날 긴 비행이 문제였다. 몸은 피곤한데 배는 더부룩하고, 거기다 시드니에서 첫 식사로 느끼한 팬케이크를 집어 넣었더니 뱃속의 그 아이들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 앞 마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임계치를 넘어버린 상황. 온라인 카페 후기에서 종종 보고 찜해뒀던 식료품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숙소가 코앞이고 조금만 버티면 곧 아이들을 내보낼수 있으니 젖먹던 힘까지 다해 참을까 했지만...
윽 이 놈의 남의 편, 2개 5달러 중인 팀탐(호주의 대표 간식. 우리로 치면 초코파이?) 앞에서 무슨 맛을 살까 고르느라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하여 하는 수 없이 나는,
"오빠, 나 아무래도 먼저 숙소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신호가 왔어. 급해!!!"
"그래? 나 조금만 더 둘러보면 되는데, 못참겠어?"
"못 참으니까 말하지."
"어어 그래 알겠어. 그럼 얼른 가. 숙소 가는 길은 알지?"
그리고 나는 서둘러 숙소로 먼저 돌아왔는데...
참고로 내가 먼저 발길을 돌릴 당시, 똥보이가 손에 든 장바구니엔 500ml 생수가 12개, 요거트와 우유가 각 2개, 사과 한 봉, 자잘한 스낵 등이 담겨 있었다.
내가 이 얘길 굳이 하는 이유는, 이 때문에 체크인 때만 해도 제2의 신혼집 러브하우스 같았던 우리의 숙소가 곧 권태기 부부의 지지고 볶고 싸우는 집이 되어 버렸는데...
일단 숙소로 돌아온 나는 무거운 아이들을 내보내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앞서 얘기했듯, 나는 큰 볼 일을 보고나면 바로 샤워를 해야하는 사람. 나에겐 이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핸드폰에는 똥보이의 카톡과 보이스톡이 반복해서 쌓이고 있었다.
내가 볼 일을 마치면 도로 마트에 와 장 본 물건들을 같이 들고 갈 줄 알았던 그는, 내가 연락도 받지 않고 오지도 않자 혼자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 아니 씩씩대며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런 전개는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나는 대뜸 짜증부터 내는 똥보이가 황당했다.
"내가 먼저 간다고 했지, 갔다 온다고 한 적은 없잖아.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어."
"짐이 많은 걸 알면 와야지. 안 그래?"
"아니 혼자 들기 무거우면 적당히 사야지.“
"물은 사야 한다며?“
"그럼 물만 사오지 그랬어. 나 화장실 갔다 나오면 바로 씻는 거 몰라?"
이상하게 부부 싸움은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잘 안된다.
잘잘못을 따져봐야 소용도 없고, 심지어 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우기게 되는 건 왜일까.
나도 속으로는 '물이 12개면 얼마나 무거웠을까, 연락도 안돼 짐은 무거워, 혼자 오는 길이 짜증스럽기도 했겠네. 그랬는데 아내란 여자는 혼자 깨끗하게 씻고 나와 아무 것도 모르는 말간 얼굴로 자신을 맞으면, 와 나라도 좀 어이없긴 했겠는데?' 생각은 했다. 생각은 하면서도 말은...
"아 그럼 애초에 제대로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내가 안 갔겠어? 왜 자꾸 짜증만 내?"
나도 덩달아 짜증을 냈다.
그러자 이번엔 똥보이가 한풀 꺾여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래. 사실 별 일 아니긴 한데,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하고 힘들어서 그랬나봐. 미안하다.“
'흐아. 이렇게 말하면 더이상 나도 할 말이 없지...'
그 순간 뭐라도 쏴 붙히려고 앞으로 툭 나와있던 내 입이 쏙 들어가버렸다.
싸고 신선한 호주의 식재료를 사다가 지지고 볶아 맛있게 먹으려고 얻은 숙소인데, 첫 날부터 지지고 볶는 부부 싸움이라니. 각자 생각해 봐도 좀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도로 부부를 이어 놓은 건 바로 이 요거트!
아웃풋에 성공하고 나자 도로 인풋이 고팠던 나는 똥보이가 사들고 온 비스켓과 요거트를 꺼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막혔던 말문이 팍 터졌다.
"헐 오빠 오빠, 이거 완전 맛있는데? 이 비스켓에다 요거트 발라서 한 번 먹어봐."
"맛있어?"
"자, 일단 먹어봐. 진짜 맛있다니까!"
"맛있네. 몇 개 더 살 걸 그랬나?"
"내일 사면 되지 뭐. 한국 가기 전에 잔뜩 먹고 가자."
"근데 큰 일은 성공한 거야?"
싸우다가도 요거트를 나눠 먹고, 요거트를 먹다가도 똥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부부!
이런 게 부부인 것도 맞지만, 사실 두 사람은 알았다.여기까지 와서 계속 싸우기만 했다간 여행이 아니라다른 게 끝나버릴 수 있다는 걸. 그러니 맥락없는 화해라도 해야만 한다는 걸…
그 뒤 우리는 침대에 누워 첫 날의 소회를 나눴고 다음날을 계획하다가, 이내 스르륵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