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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보이 Sep 20. 2024

호주라는 나라와 나라는 사람.

그리고 시드니에선 말도 참 예쁘게 하는 남자.

"근데 말야 오빠. 생각했던 것보다 호주가 유럽보다 아시아 같다.

참, 아시안 게임 참여국이니까 아시아가 맞나? 아닌데 오세아니아 대륙인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건 실제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고 내가 남편인 똥보이에게 했던 말이다.

우리는 주로 트레인과 트램을 이용해 시티로 향했는데, 그 안엔 다양한 국가의 아시아인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같은 관광객도 있었지만, 그곳에 터전을 두고 직장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민국가 호주이니 어쩌면 다양한 일. 그런데 유럽의 어느 나라쯤을 상상했던 내겐 조금 이외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번에 나는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내 기억 어렴풋한 곳엔 호주가 아시안게임에 참여한 걸 본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그래서 순간 아시아 국가인가 착각을 하기도 했는데), 호주는 오세아니아 국가가 맞고 축구만 예외적으로 아시아축구연맹(AFC)에 소속돼 월드컵 예선전을 치룬다고 한다. 이는 축구에서의 경쟁력을 높히고, 더 많은 국제 대회 경기 기회를 갖기 위한 호주의 전략적 결정이었다고 하는데...

고로 내가 봤던 우리나라와 호주의 축구 경기는 아마도 월드컵 예선전이거나 아시안컵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주변에 사람들만 보면 익숙한 아시아인가 싶다가도, 하이드파크를 지나 쇼핑 센터들이 몰려있는 피트st로 가면 고풍스런 건물들과 거리를 가로지르는 트램이 한껏 이국적인 멋을 뽐내는 시드니!

그 사이를 걷고 있자 그때서야 멀리 떠나온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왜 이제야 여기를 왔을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기분 좋은 안도감과 행복감을 선사했는데…

기분이 한껏 업된 김에 나도 똥보이에게 립 서비스를 선사했다.


"오빠 덕분에 시드니도 와 보고 너무 좋네. 고마워~"


그러자 대번에 어깨가 으쓱 올라간 똥보이가,


"거봐 토보이. 남편 잘 만나서 죽기 전에 이런 데도 와보고 좋지? 길 다 찾자주지 안내해주지, 토보이 넌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 안그래?"


사실 여기까지만 들었을 땐, 내심 똥보이가 허세를 좀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일본 가면 늘 그랬거든. 네가 다 해주니까 편하고 좋더라고. 그래서 고마웠어."


아,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다 들어봐야 한다.

똥보이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던 것도 괜시리 미안해진 나. 매사 내가 남편에 비해 조금씩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곳을 잘 안다고 해도, 나만 믿고 따라온 누군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안내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잘 알아봤다고 해도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고, 꼬인 동선을 풀자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미안해 하면서 다시 길을 찾고 안내를 하는 건, 보통 인내와 수고스러움으론 되는 일이 아닌데...  

그걸 알기에 (그리고 똥보이가 과거에 내가 그랬던 걸 알아줬기에) 늦은 저녁 숙소로 돌아가는 길. 트레인을 잘못 타 시티에서 외곽으로 벗어났어도, 하루의 피로가 온몸을 휘감고 배가 고파 허리가 절로 굽어도, 똥보이에게 짧은 한 숨조차 짓지 않... 으려고 노력한 나. (한 숨 정돈 쉬었을지도 모르겠다)

관용의 폭이 넓어지면서 생각도 절로 긍정적이게 변했다.


"낮에는 은퇴한 부자들이 모여사는 왓슨 베이(Watsons Bay)에 가보고, 저녁엔 평범한 시민들 어쩌면 시드니를 움직이는 이민자들 동네엘 다 와보네! 우연히 잘못 탄 트레인이지만 결과적으론 아주 의미있는 하루다. 안 그래?"




그리고 다시 숙소가 있는 마스코트 역으로 되돌아온 우리.

늘 그렇듯 하루의 마무리는 숙소 앞 마트다. 마트는 살 게 있어도 살 게 없어도 매일 가는 게 국룰, 아니 부부의 룰인데...  

특히나 이 날은 벼르고 벼르던 소고기를 구워먹기로 한 날. 호주산 청정우를 실컷 구워먹기 위해, 앞서 얘기했듯 우리는 숙소도 호텔 대신 레지던스로 잡았다.

그리고 이곳은 집에서조차 웬만해선 절대 고기를 굽지 않는 내게, 고기 굽기를 허락해준 관대한 숙소.

우리는 저렴하고 질 좋은 목초 먹인 소고기와 한국에서 가져온 인스턴트 밥과 국으로 근사한 저녁상을 차렸다.


너무 맛있었던 고기!

 

그런데 한편으론 이걸 소화시키고 배변에 성공해둬야 다음날 갈 타롱가주(Tronga Zoo) 오픈런에 부담이 없기에 그 걱정이 조금 앞서기도 했는데...

적게 먹느니 많이 먹고 밀어내겠단 생각에 먹고 또 먹고 왕창 먹은 나. 그리고 다 먹은 후엔 다시 소화도 시킬 겸 마트로 밤마실을 갔다.  

여기가 아니면 언제 다시 먹어볼 수 있을지 모르는 것들이나 놓치고 보지 못한 것들이 있을까봐, 쉬엄쉬엄 보고 또 보고, 손은 주섬주섬 담고 또 담고 그랬는데...

줄이고 줄여 꼭 필요한 것만 산다고 샀는데도, 숙소로 돌아와보니 어제 산 먹거리에 한국에서 챙겨온 먹거리도 그대로.  일정은 이제 겨우 나흘 밖에 안남았는데, 족히 열흘 이상은 먹을 수있는 식재료들이 숙소에 남아있었다.

 

관광지 입장료보다 마트 먹거리에 더 돈을 많이 쓰는 부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여행 후기들을 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음식들을 해먹고 사먹고 잘 지내다 오는 걸까?

짧은 일정 속 많이 먹어도 세 끼. 이것저것 욕심껏 먹는다 쳐도 못 먹고 가는 것들이 천지다.  

사실 시드니에 와 그 사이 우리가 맛본 음식도 별 게 없다. 팬케이크 집 한 번, 브런치 집 한 번, 여기에 말레이시아 음식, 중국 마라꼬치, 수박케익, 호주 청청우 정도가 우리가 먹은 전부인데...   

그런데도 숙소엔 사다놓고 안먹은 음식들이 대기 중이고, 그런데도 나는 며칠 사이 몸무게가 3kg은 족히 찐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돌아가 해야할 급진급빠 생각에 급우울...


사실 시드니에 오기 전 나는 비싼 PT나 약에 돈을 써 다이어트를 하느니, 그 돈으로 여행 계획을 잡고 그걸 동기 삼아 살을 빼겠다고 공언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리즈 시절 몸무게를 만들고 여행을 가, 예쁜 사진들을 잔뜩 찍어오겠다고 공언했던 사람도 나다.

그런데 살이라곤 100g도 못빼고 여행을 가, 도리어 내 몸의 심각성만 다이어트의 시급함만 뼈저리게 느낀 나.

아무 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림 같기만 한 시드니의 풍광이지만, 밤마다 숙소로 돌아와 내가 하는 일은 애써 찍은 사진들을 도로 휴지통에 집어넣는 일이다.

왜냐고? 낮에는 역광 때문에 잘 안보이던 사진 속 살찐 내가 숙소로 돌아와 다시 보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서다. 그러니 앞으론 시드니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진에 담고자 할 땐, 사진을 망치는 주범인 나는 빠지기로 했는데…


"무슨 소리야. 그럴수록 더 많이 찍어야지. 원래 백 장 찍어 한 장 건지는 게 사진이야. 다들 그래."


시드니에선 하는 말마다 다 예쁜 남자. 내가 알던 한국의 똥보이가 맞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도 나는 슬프고 우울했다.

시드니에서의 하루하루가 줄어드는 건 슬프고, 돌아가 살 뺄 생각에 그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건 우울


그렇게 또 시드니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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