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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보이 Sep 03. 2024

아내의 갱년기와 남편의 번아웃이 만나 바야흐로 권태기.

부부는 왜 그곳으로 갔는가.  

일단 고백 한다.

사실 나는 늙은 신혼 아내가 아니다. 그냥 늙어가는 아내다.

느즈막히 한 결혼에 기가 막히게 좋았던 신혼은 찰나였고, 요 몇 년은 사실 갱년기가 찾아와 골골대기 바빴던 갱년기 늙은 아내다.


아마도 다소 이른 갱년기를 불러온 건, 코로나 그 놈이지 싶다.

그 놈의 리즈 시절 나는 각종 질병에 시달렸고, 노화는 (체감상) 두 배 빠른 속도로 나에게 들이닥쳤다.

그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이슈..." 가 아니라 몸이슈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어딘가가 아프고 불편했고, 남편도 그런 아내가 썩 좋았을리 없다.  


그런데 이번엔 남편에게 번아웃이 찾아왔다.

남편의 번아웃에 불을 당긴 건, 왕복 세 시간의 출퇴근 길이다.

우리는 운 좋게 청약에 당첨돼 결혼 6년 만에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부부지만, 새로 이사온 집은 직주근접과는 거리가 먼 딴 나라, 아니 신도시다.

매일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와 지하철에 끼여 서너 시간 출퇴근을 반복하는 일은 몸도 몸이지만 정신을 좀 먹는 일. 용가리 통뼈에 제법 근수저라 버텨낼 줄 알았던 남편도 뜻밖에 정신이 뚫리고 말았다.     

평소 유쾌하다 못해 장난기 넘쳤던 남편이 부쩍 말수는 줄고 한 숨과 잠이 늘었다.

퇴근해 들어오면 씻기는커녕 먹는 것도 마다하고 누워 자는가 하면, 한 번씩 "막막하다." "답답하다."란 소리를 한 숨에 뒤섞어 내뱉었다.

그러니 한 지붕 아래 사는 나라고 편했겠나. 그를 보고 있으면 나도 막막하고 답답했다.

   

이해와 걱정, 그건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한 번씩 치밀고 올라오는 짜증은 나도 어쩌지 못했다.

'남편 너 사람 잘못 골랐어. 이래봬도 나 갱년기 여성이야!' 는 웃자고 하는 소리고,

생각해보면 남편도 참 운이 없다.

'하필 지금이 딱 갱년기인 나를 아내로 둬서, 온전히 위로도 못받고 기대지도 못하네...'

미안한 마음이 컸다.




언제까지가 신혼일까?

사실 정답은 없고 개인차만 있는 질문이긴 하다.  

그런데 나는 딱 이때, 우리의 신혼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러니까 나의 갱년기와 남편의 번아웃이 만나 바야흐로 권태기가 찾아왔을 때.  

보통은 딸의 중2병과 엄마의 갱년기가 만나면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가 벌어진다고 하는데, 우리의 경우는 나의 갱년기와 남편의 번아웃이 만나 한판 대차게 붙었다.

그리고 결과 우리에게도 기다리던(?) 권태기가 찾아왔다.


남편은 계속 지쳐 있었고, 나는 그런 남편을 계속 채근했다.

"제발 힘 좀 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게 해 밝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들이 도리어 남편을 지치게, 힘들게, 우울하게 만든 건 아닌가 싶다.

때문에 우리는 전에 없이 부딪혔고, 부딪히다 별안간 '그냥 확 헤어져 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했고, 숨이 막혔고, 더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런데 헤어지는 건 어찌 보면 그 시공간에서 나만 혼자 빠져나오는 일.

그런데 보다 더 내가 원했던 건, 그 사람이 나의 손을 잡고 그 답답한 시공간에서 함께 빠져 나오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안했다. 권태기 여행을...




"당장 이사나 퇴사는 힘들지만, 길고 먼 휴가라도 다녀오면 어떨까?"


사실 길어봐야 열흘이고, 멀어봐야 호주다.

그렇지만 허리 디스크에 무릎 연골연화증, 멀미와 난기류 공포가 있는 나에겐 그 어떤 것보다 나를 걸고 한 큰 선택이고 제안였다.

둘 다 환갑이 되는 해에 호주로 되돌아가자며 한 푼 두 푼 모아뒀던 호주 달러도 무릎 연골연화증을 진단받은 뒤론 아예 포기하고 다 털어쓴 나다.

그런 내가 호주 달러도 다 쓰고 없는 마당에 별안간 호주행을 제안한 거다.  

이유는 그곳이 남편의 젊은 시절 추억이 있는 그리움의 땅이기 때문...

남편은 근 20년 전 20대 끝자락에 그곳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그리고 한 번씩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전여친이라도 생각하시나봐? 가서 또 만나는 거 아냐? 이래서 내가 호주는 절대 안간다고 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그거라도 좋으니 호주가 남편에게 좋았던 기억을, 행복했던 기운을 되살려주길 바랬다.


"아, 나는 호주도 영어도 무식자인 건 알지?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한 번 준비해봐. 부탁할게."


참고로 이번 여행은  그동안 모든 여행을 계획하고 이끌었던 나(J)대신, P인 남편이 준비했다.

가서 지내는 시간 못지않게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이 남편에겐 작은 즐거움이자 치유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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