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나주하면 곰탕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주 분들은 곰탕 말고도 말고도 많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곰탕 이야기를 해볼 거라 곰탕으로 하겠습니다.
방학 중에 나주에 정말 곰탕 먹으러 갔었습니다. 다른 이유 없이 곰탕 먹으러요. 뭐랄까 어릴 적엔 뭐 하나 먹으러 어디 멀리 간다는 게 참 소모적으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확연하게 나이가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양상이 다르긴 하지만 나이가 더해지면서 모든 곳에서 삶의 여유가 생기는 사람이 있고, 되려 반대로 더 급해지고 더 못 참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건 다분히 제 주위의 몇 분을 통해 겪은 개인적 이야기로 생각하시고 그렇다 아니다 따지기 없기로 합니다. 그 좁은 통계에서 저는 전자 쪽입니다. 확실히 나이가 늘어가면서 삶의 태도나 타인을 대하는 마음은 더 너그러워졌고 삶은 여유로워졌습니다.
그런 생각 딱히 해본 적은 없는데 80세를 산다는 가정을 해보면 이미 절반을 훨씬 넘어버린 나이가 되고 보니 정말 남은 날들에 대한 욕심이 많이 사라집니다. 남은 시간들은 좀 더 너그럽게 평안하게 지낼 수 있는 준비가 잘 되어 가고 있는 것도 같아 안심입니다. 이 나이 되도록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다는 말이 가끔 나오긴 하지만 이 나이까지 이렇게 잘 살아낸 스스로에게 사실 좀 뿌듯한 마음도 큽니다. 잘 해오고 있지요.
그런 맥락에서 어릴 때라면 굳이 먹을 거 찾아 먹으러 그 먼 거리를 가는 게 소모적으로 느껴졌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음식 하나 먹으러 갈만한 그런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함께 마주 앉아 곰탕 한 그릇, 아니 각자 한 그릇씩 놓고 든든하고 먹음직스러운 수육도 한접시 같이 주문해 고소한 참기름장에 찍어 먹었습니다. 중간에 공기를 추가해 밥을 말면 진득한 느낌이 안 나서 애초에 공기를 추가해 처음부터 두 그릇을 말아서 먹기 시작합니다.
나주곰탕. 그래요 여기 '하얀집'이라는 식당이에요. 최애랍니다.
절반쯤 먹었을 때일까요?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드시던 손님의 주문을 받던 식당 아주머니께서 물통을 엎제르셨습니다. 그런데 엎질러진 쪽이 우리 쪽 테이블이라 밥 먹던 테이블이 완전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사색이 되셨고, 옆 테이블에서는 우리 테이블 눈치를 보시더라구요. 그런데 그 와중에 제가 한마디 했더랍니다.
물이니까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괜찮아요.
와중에 스마트폰은 쏟아진 테이블 수영장에서 헤엄쳤지만 다행히 음식은 그릇에 담겨 있어서 영향이 없었습니다. 함께 테이블을 수습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또 먹습니다. 맛있거든요.
평소에도 과잉 친절을 베푼다며 구박하시는 분께서 눈을 흘기십니다. 나름은 배려인데 조금은 그런 면도 있습니다. 살면서 일이 되어서 한다기 보다 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최대한 듣는 습관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직업의 영향도 있습니다. 늘 수용하고 되도록 들어주는 입장이 삶의 태도에 스며들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저는 거의 다 먹어가는데 반대쪽 곰탕 그릇의 밥 양이 점점 늘어납니다. 처음 먹을 때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다 먹어갈 즈음엔 아예 밥이 국물 경계를 넘어 밖으로 솟아오를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많아졌다기보단 밥알이 국물에 불어버린 거겠죠. 따뜻할 때 먹어야 하는데 중간에 테이블에 홍수도 나고 하다 보니 더 시간이 걸려 배부르게 먹었다는데도 그릇엔 불어난 밥이 가득합니다.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을 여기서 체험하네!
둘 다 까르르 웃음이 터졌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너무 웃긴 겁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에서 물고기가 생선이 아니라 '물에 빠진 고기'인가봐.
밥 잘 먹다가 둘 다 정말 빵 터졌습니다. 다행히 식사의 끝머리에서 터진 오병이어의 기적 체험으로 물병 홍수로 조금은 어색했던 그날 식사 테이블의 분위기를 다시 챙길 수 있었습니다. 깔깔대며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근처 길을 손잡고 걷습니다.
함께이기에 크고 작은 일들을 울고 웃으며 보낼 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당연한 듯 의식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한 번씩 당연하지 않은 이 기적 같은 매일매일의 날들에 정말 감사하게 됩니다. 너무 일찍 철들어 책임감으로 살아온 시간들이 참 괴롭고 고단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며 생각지도 않은 감사의 열매가 달렸습니다. 감사를 입에 달고 사는 저는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감사 없는 삶은 고통의 씨앗이 훨씬 빨리 크게 자랍니다. 고통의 씨앗이 날아들지 못하게 할 순 없지만 마음 밭에 날려 드는 그런 씨앗들은 바로바로 주워내고 또 싹튼 게 있거든 감사의 마음으로 자라기 전에 뽑아내고 있습니다.
곰탕 한 그릇으로 체험한 웃음 가득했던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처럼 앞으로도 부른 배를 함께 움켜쥐고 달빛 가득한 저녁 길을 걸으며 함께이고 싶습니다. 함께이기에 이 험한 삶의 순간들도 견딜 수 있는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