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은 언제일까?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 때부터? 짐을 싸는 순간부터?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마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나에게 여행의 시작은 비행기를 탄 그 시점이었다. 생애 첫 비행기가 무려 11시간짜리. 난 아마 그걸 간과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시력이 좋지 않아 렌즈와 안경을 끼곤 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비행기에 타고나서 몇 시간 후에 눈이 따끔거리면서 아팠다. 그리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혔던 '결막염'이 시작되었음을.
더욱 큰 일은 비상약, 상비약은 챙겨놓고 결막염 관련 약은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야 병원에 가서 약 처방받으면 2-3일 안에 괜찮아지지만, 비행기에서 이런 일을 겪으니 참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비행기를 다시 돌려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아픈 눈을 부여잡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나, 나는 엄청난 갈증에도 시달렸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마른기침이 계속 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승무원에게 물 1L를 달라고 하고 싶었다. 게다가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몸이라고 증명이라고 하듯 내 온몸은 붓기 시작했다. 발 정도는 부을 거라 생각해서 신발끈도 늘려놓고 했는데, 이건 뭐.. 이쯤 되면 비행기랑 안 맞는 건가? 이 여행 불안하다.. 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도착은 했다. 11시간을 날아서 왔건만 도착했을 때는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되게 설레고 기쁠 줄 알았는데..
까다롭기로 유명한 런던 히드로 공항의 입국심사도 통과했다. 운이 좋은 건지 소문이 너무 널리 퍼진 건지, 그렇게 깐깐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설렁설렁했을 수도 있긴 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겁이 없다. 뭘 믿고 밤 10시 넘어서 도착하는 비행기를 탄 거지..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기 위해 오이스터 카드도 발급받았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덕분이랄까.. 지하철은 굉장히 한산했다. 조금 무서울 정도로.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숙소 근처 역이 너무 커서, 20kg이 넘는 캐리어를 들고 헤매다가 민박 직원이 마중 나왔을 정도니까.
간단히 짐을 풀고, 씻고 자려고 누워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11시간을 비행해서 유럽에 왔다는 것도,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여행만 해야 한다는 것도. 내가 멍을 그렇게 잘 때리는 스타일이 아닌데, 그날 밤은 참- 멍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