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마리와의 향기로운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토요일 오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히마리 아빠의 영상 전화다. 재빨리 핸드폰을 챙겨 복도로 나갔다.
“외부에 계신가 보네요.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
“괜찮아요. 도서관인데, 열람실에서 나왔어요. 다들 잘 있지요?”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히마리가 자랑하고 싶다는 것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그러자 곧바로 핸드폰 화면이 히마리 얼굴로 가득 찼다.
“파파오지상*, 어디야?”
“여기 어딘지 기억나?”
전화기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도서관 복도 계단을 보여줬다.
“응. 도서관이네. 히히, 기억하지. 그런데, 나 젓가락질 잘한다! 이제 포크가 아니라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을 수 있어. 파파오지상 잘 봐, 보여 주께”
그러더니 식탁에 앉아 젓가락으로 그릇에 담겨 있는 어묵을 집는다. 앗, 어묵이 쏙 미끄러졌다. 어묵은 두어 번 더 미끄럼을 탄다. 보고 있는 오지상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결국, 한 손으로 어묵을 잡아 고정시킨 후 젓가락으로 집는다. 다음번에는 두 번 만에 어묵을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아직은 서툴러 보인다.
'그래도 잘했다, 히마리야. 곧 더 잘하게 될 거야. 요네하라 마리 米原万理 작가님이 ‘입은 여왕, 손은 하인口は女王、手は サーバント’이라고 하셨거든. 입은 여왕이시니 절대로 입을 음식에 가져가면 안 된다는 게지. 아직은 서툴더라도 계속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도록 연습해야 해. 알았지?'
“우와, 히마리 짱 이제는 젓가락질도 잘하는구나. 굉장하네! すごいね!, 대단해! えらいね!”
“대단하지? えらいでしょう? 굉장하지? すごいでしょ?”
“우와, 이젠 다 컸구나. 진짜 샘물반 언니가 되었네. 잘했어!”
순간 울컥해진다. 젓가락 사용법을 배우니 함께 음식을 먹고, 또 먹여 주던 파파오지상이 생각났구나. 그래서 자랑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었구나. 그 마음이 고맙다. 2주 전보다는 표정도 더 밝아지고, 안정된 것 같다.
天仁에게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이는 히마리이지만, 사실 그녀는 4년 6개월 인생 중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총명한 데다 적극적이고 붙임성이 좋은 아이라 2주~한 달 예정의 유치원 적응기간을 단 이틀 만에 끝낸 히마리다. 그렇지만, 한국어 숙달에는 당연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친구들에게 한국말로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없으니 함께 놀기에 얼마나 갑갑할까?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혓바늘이 돋아 오랫동안 유치원 급식을 잘 먹지 못했고, 조퇴를 한 적도 있었다. 안타깝지만 주변에서는 도움만 줄 뿐, 히마리가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유치원에 점점 더 재미를 붙여가는 모양이다. 히마리는 집에서도 한국말을 잘 모르는 엄마 앞에서 한 두 마디 한국말을 내뱉는다고 한다.
“점점 더 재미있어질 거야. 힘내頑張ってね! 히마리 짱! 오지상은 늘 히마리 응원하고 있어 いつも応援しているよ”
하루에 서른 번도 더 보고 싶다는 농담같은 본심과 언제든지 전화를 하라는 말을 남기고, 아쉽지만 저녁 먹으라고 전화를 끊었다. 자랑할 것이 없어도 매일 전화를 해 줬으면 좋겠다.
서울로 이주한 뒤 히마리 엄마는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지내는 모습,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 등의 사진을 매주 보내온다. 히마리 엄마는 일본 유치원이 매우 정적인데 비해 한국의 유치원은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매우 활력이 있어 좋다고 한다. 집도 넓고, 주변에 놀이터와 공원도 많아 아이들이 놀기도 좋아, 서울 생활에 아주 만족한다고 한다. 조금씩 한국 생활에 녹아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다.
며칠 전에는 아내가 히마리 외할머니의 연락을 받고 점심을 함께 먹었다. 점심을 드시던 외할머니가 잠깐 인사라도 하시겠다고 해서 사무실에 있던 天仁과도 통화가 되었다.
“철마다 히마리 옷도 많이 사 주시고, 그림책도 많이 빌려다 주시고, 주말마다 함께 놀아 주시고, 값 비싼 치즈랑 과일이랑 맛 난 것도 많이 먹여 주시고, 도서관에 데려가 주시고, 지하철 태워 시내 구경도 시켜 주시고, 식당에도 여러 군데 데려가 주시고, 한국어도 가르쳐 주시고, 서울에 잘 정착하도록 도와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히마리 엄마도 天仁이 옆에 계셔서 늘 든든하고, 안심이 된다고 여러 번 얘기했어요. 뭐라고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치 녹음된 국회의원 선거운동 방송처럼, 속사포로 말씀을 이어 가신다. 히마리 외할아버지는 10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셔서 할머니 혼자 계시니 누굴 만나면 대화를 많이 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히마리가 天仁네에 놀러 왔을 때도 간혹 함께 오시면 30분은 기본, 天仁과의 대화를 아주 좋아하셨다. 언제나 밝은 히마리가 외할머니를 닮았는지 할머니는 매우 경쾌한 분이라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해 주신다. 저녁에 퇴근을 했더니 외할머니가 주고 가셨다는 꽃다발, 쿠키와 고가의 오가닉 미용 오일이 놓여 있었다. 근사한 점심도 사주고 가셨다는데 아무튼 고맙다. 전에 간혹 天仁네에 놀러 오실 때도 늘 쿠키 등 선물을 챙겨 오셨는데, 마음 씀씀이에 늘 감사한다.
2주 전에는 주문도 하지 않은 택배가 집에 도착해서 의아해했던 일이 있었다. 프랑스 산 르 크루제 LE CREUSET 주물 냄비였다. 송장을 확인해 보니 발송자가 히마리 엄마였다. 뭐냐고 연락을 했더니 ‘아직은 이 정도밖에 할 수 없어서 너무 죄송하다’는 답이 왔다. 세 명 아이들 챙기느라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을 텐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늘 말해 왔다. 받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걸 보낼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서울 생활에 적응이 되었나 싶어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한다. 히마리 동생들도 이제 30개월이 되어 놀이터에 나가도 넘어지지 않고 잘 놀아 손이 조금 덜 가 편해졌다고도 한다.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일본에서 보다는 적으니 히마리 엄마의 몸은 피곤할지 몰라도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남편과 가족이 모두 함께 살게 된 효과가 아닌가 싶다.
히마리가 서울로 이사 가기 전에는 히마리의 큰 이모, 이모할머니의 영상편지를 받기도 했다. 정중하면서도 인정이 묻어나는 말씀들로 “히마리에게 잘해줘서 고맙다. “, “가족들도 도저히 해 줄 수 없는 큰 도움을 주셔서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인사 영상이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天仁네가 히마리에게 받은 것이 더 많습니다.”라고 답해 드렸다.
히마리네는 天仁이 한국에 귀국하면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사실 天仁네 서울집은 히마리네에서 한강만 건너면 되는, 자동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 히마리가 天仁의 고국 서울로 떠났지만, 히마리가 天仁네에 쏙 들어오면서 시작된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히마리가 서울로 떠난 지 54일째 되는 날이다. 몇 달이 후다닥 지나가고, 히마리의 한국말이 하루빨리 늘어 하루하루가 즐거운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향기로운 인연이 이어지는 이 순간을 감사, 또 감사드린다.
주*) '파파오지상' : 히마리가 두 살 때부터 天仁을 부르던 호칭. 아빠를 뜻하는 '파파'와 아저씨를 의미하는 '오지상'을 합친 말. 히마리 엄마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는데, 아마 아빠와 떨어져 살던 히마리가 아빠 = 남자라는 인식, 또는 天仁 아저씨에게서 곁에 없는 아빠의 느낌을 느껴서 그리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