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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다유 Sep 23. 2024

왜 빨강머리 앤에게 아직도 열광하는가

누구에게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이 있다

교복자율화가 시작된 첫 해에 나는 아주 우울한 마음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인문계와 상업계로 나눠졌다. 그 당시 송파구가 서울 변두리 동네로 있던 시절, 이제 막 신설된 학교의 학년주임 샘들이 서울의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에게 촌지를 은근슬쩍 내밀며 우수한 학생들을 자신들의 학교로 데리고 가고자 로비를 했다.


학년주임이었던 중3 담임은 선생님의 말씀은 다 옳다고 생각하는 나의 부모님에게 딸이 공부를 잘하니 3년 장학생의 조건 좋은 학교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했다. 줄줄이 남동생 둘을 대학에 보내야 했던 나의 부모님은 은근슬쩍 상업고등학교 진학을 종용하셨고 멀미가 심했던 나는 버스를  한참 타고 가야 하는 여상을 힘겹게 다녀야 했다.


처음에 몰랐던 인문계와 상업계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한 건 나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들과 대화에서 점점 멀어지는 학교생활과 공부에 대한 수준 차이였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사춘기가 시작이 되었던 것 같다. 나의 앞날은 기껏 회사원인데 저 친구들은 더 높은 꿈을 가지고 있다는 부러움과 시샘에서 시작된 나의 열등감,, 그것은 대학이라는 가지 못할 것에 대한 동경이었다



빨강머리 앤은 자신의 빨강머리가 너무 싫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머리색이 황금물결처럼 밝은 금발이나, 윤기 나는 흑발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마릴라 아주머니가 외출하고 집에 없는 날 찾아온 만물상 외판원에게 자신의 용돈을 다 주고 염색약을 구입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초록색 머리로 염색이 되어 짧게 커트를 해야 했지만 나는 앤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된다


그런 앤에게 길버트라는 남학생이  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야,, 홍당무! 홍당무!'


하면서 놀려댔을 때는 도저히 제어되지 않는 분노가 있었을 것이다

길버트는 그 이후 앤에게는 결코 친하지 못할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고, 무엇이든 길버트를 이기고 싶은 경쟁상대로 자리를 잡는다


앤의 빨강머리는 나에게는 가지 못한 대학이다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나의 열등감은 결국 공부에 대한 미련으로 이어졌고, 졸업장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힘겹게 가지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에 방영되었던 추억의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을 책을 통해 다시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빨강머리 앤이 보인다

낭독을 배우니 좋은 문장이 나오면 소리내어 낭독을 하고 싶어진다. 가만히 소리 내어 따라 읽다 보면 보이지 않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환희와 감동이 내 몸을 휘감을 때가 있다. 오늘도 낭독봉사를 위해 가만히 책을 녹음하며 빨강머리 앤의 사랑스러운 명랑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음의 친구 다이애나에게

"상상력이 없다면 세상은 암흑 같을 거야"

 

"다이애나, 아! 이렇게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이런 날에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니?

이런 날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해.

물론 그 사람들에게도 좋은 날이 닥쳐오긴 하겠지만.

그렇지만 오늘이라는 이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니까 말이야."


마릴라와 매튜가 원하던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파양을 당하기 직전까지 몰린 앤,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초록지붕 집의 아이가 아니라 달아나고 싶었던 고아원으로 되돌아가는 절망적 순간에


"전 이 드라이브를 마음껏 즐기기로 작정했어요.

즐기겠다고 결심만 하면, 대개 언제든지 그렇게 즐길 수가 있어요!"

 



빨강머리 앤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신지식' 선생님이다

우리에게는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되고 제작된 빨강 머리 앤을 많이 알고 있어서 소설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인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빨강머리 앤 번역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학생들도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도 많고, 거리에도 그렇고

다 그냥 좌절돼 있는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빨강머리 앤' 주인공 앤이

그런 어둡고 쓸쓸한 가운데서도 그렇게

명랑하게, 자기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아, 이것 좀 이제 아이들한테 읽혀줬으면 좋겠다"


부고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신지식 선생님의 과거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이 땅에 참된 교육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중학교시절 담임 선생님이 겹쳐진다.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선 제자의 입장에서 진정 어린 조언을 해 주었더라면 지금의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 본다.


누구나 자기만의 빨강머리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다 가지고 산다

난 내가 가진 빨강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스스로 이겨내면서 살아가고 싶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힘들 때는 유일하게 따라 부르는 빨강머리 앤의 주제곡을 따라 부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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