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글쓰기 수업을 크게 동경했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필력이 상승하지 않을까,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막히면 나는 습관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곤 했다. 내가 전문적으로 배웠으면 뭐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날이 이어져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이 솟구친 어느 날, 나는 충동적으로어느 글쓰기 학원에 연락했다. 잘 알아보고 연락한 것은 아니다. 포털에 검색했을 때 첫 번째로 뜬 사이트가 바로 이 학원 사이트였고, 나는 홀린 듯이 수강 신청 버튼을 바로 눌렀다. 수강료가 비싸기는 했지만, 실력 향상을 위해 못 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해당 수업이 내가 처음으로 수강하게 된 소설 창작 수업이다.
학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품었던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작법 이론을 꼼꼼히 배워봤자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소용없었다.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써보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다. 깨달은 건 또 있었다. 내 글이 별로라는 사실 말이다.
첫 합평을 받았을 때였다. 나는 내가 쓴 단편소설 A를 제출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혹평을 잔뜩 들었다. 선생님부터 수강생들까지, 내 소설의 안 좋은 점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정말이지, 예상 못했던 일이다. 당시 나는 내가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쓴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소 오만한 태도였다)
수강생들이 적어준 피드백 종이를 열심히 읽다가 나중 가서는 대충 읽었다. 전개를 바꿔라, 배경을 바꿔라, 주인공을 바꿔라, 말투를 바꿔라, 나이를 바꿔라, 직업을 바꿔라. 그런 피드백이 한가득이었다. 사실상 다른 소설을 쓰란 소리였다. 고칠 의지를 상실한 나는 끝내 퇴고를 포기했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작문 수업에서 쓰라린경험을 얻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었다. 날씨가 쌀쌀해질 즈음, 나는 새로운 소설 창작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수업이었다. 예전과 같은 환상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수업을 듣고자 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노력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던 시점이다.
안타깝게도 그 바람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수강 신청한 이후로 회사 업무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나는 지각하기 일쑤였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합평 시간을 미루고 미뤘다. 결국 마지막 수업 날에 평가받기로 했다. 합평용으로 제출한 작품은 그렇게나 학원에서 혹평을 받았던 단편소설 A였다. 바빠서 어쩔 수 없었다. 새로운 단편을 쓰고 마무리 지을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 수업 날, 나는 새벽까지 야근하느라 피로에 찌든 몸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갔다. 솔직히 집에서 푹 쉬고 싶었는데, 합평을 위해 미리 내 작품을 읽어왔을 선생님과 학생들이 마음에 걸렸다. 억지로 출석한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수강생들을 마주 보았다.
습작에 불과한 소설을 시간을 들여 읽어주고 평가까지 해준다니. 이 기회가 귀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작품을 손에 들고 있는 수강생들을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 봤다. 나는 이미 이 소설의 나쁜 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학원에서 충분하리만큼 자세히 들은 상태였다. 고칠 점이 너무 많아 오히려 고칠 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는데, 마냥 설레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합평 분위기가 훈훈하게 흘러갔다. 전체적으로 반응들이 좋았다. 과분한 칭찬을 듣기도 했다. 지금껏 접한 합평작들 중에서 제일 재밌게 읽었다는 평부터 감동받았다는 평, 그리고 무려 신춘문예에서 당선될 것 같다는 평까지. 얼떨떨했다. 물론 불호 의견도 꽤 나왔다. 외국 문체 같다는 이야기, 내용이 잘 안 읽힌다는 이야기, 작품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야기 등. 어쨌든 학원에서처럼 혹평 일색은 아니었다.
수업을 마친 후 이 단편소설를 다시 제출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번 합평 시간이 없었다면 A를 잊었을 것이다. 어떤 조그마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휴지통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다시는 이런 소재로 글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이었다. 그럴 일이 생기지 않아서. ‘독자가 달라지니 같은 원고여도 평가가 달라진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비단 합평에서만 이런 경우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조직에 속하느냐에 따라서도 나에 대한 평가가 상이하게 바뀌었다. 나란 인간은 그대로인데 말이다. B사에서 나는 좀 굼뜬 인턴이었다. 그렇게 취급받았다. 반면 E사에서는 꼼꼼한 직원이라고 평가받았다. 내 신중한 면을 E사의 상사들은 다르게 본 것이다.
과거 친구 문이 내게 해준 말도 이와 비슷한 경우 같다. 좋아하는 말이라 오래 기억하고 있다. 자괴감에 지독하게 시달린 날, 나는 그녀에게 푸념했었다.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힘들다고.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예민한 거냐고. 이런 내가 역시 이상한 게 맞지?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꾸했다. “넌 예민한 게 아니라 섬세한 거야.” 절대적인 기준같은 건 없는 거라고,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들려 눈물이 슬쩍 나왔다. 몹시도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