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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라쥬 Jul 03. 2020

잡생각 속에서 길을 잃다

정체불명


아이의 미술 숙제를 도와주다 말고 도화지 한 장을 제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손이 가는 대로 물감에 물을 찍어 이리저리 그어봅니다. 조금은 흐리멍덩한 황토색 물감을 이리저리 그어대다 붉은색 주황색 녹색 물감에도 손을 대 봅니다.




어느 날이었지요.

저기 멀리서 그 아이가 뛰어오는 것이 보이는군요.

얼마나 뛰었는지 조금은 풀려버린 듯한 발걸음으로 점점 다가옵니다. '나 정말 힘들다'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의 힘든 표정에 조금씩 웃음이 번져가며 풀린 다리에 가속이 붙습니다.


"여기 있었네. 한참을 찾았잖아. 캠퍼스 한 바퀴 다 돌았네.. (헉. 헉.)"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화창한 4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강의실에서 출석체크를 하고 나서 문득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답답한 강의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고 싶어 진 나는 슬그머니 뒷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녀석에게 들켜버렸나 봅니다.


밝은 햇살 아래 한참을 울고 있던 나는, 녀석이 부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미처 눈물을 닦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녀석은 제 옆에 털썩 주저앉아 아무 말 없이 그저 꽈악 안아주었지요. 녀석의 품은 너무도 따뜻하고 설레었습니다.





세차게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지요. 건물 앞 계단에 앉아있던 녀석은 말했습니다.


"너 승현이랑 만나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그랬잖아. 나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예전만큼 잘해줄 자신이 없다고.. 이제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아니야? 어쩌면 그냥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맞지 않는 건가 싶어."


"그게 아닌데.. 하아.. 지금 내 상황이 힘들어서 예전만큼 잘해줄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한 건데.. 사실 우리 아빠 사업이 잘 안되어서.. 그래서 엄마 가게도 좀 힘들고.. 너도 알잖아. 그래서 요즘 내가 친가에 자주 가게 되는 거.."


사실 몰랐습니다. 녀석은 늘 제 고민을 듣고 위로해주고 감싸주는 사람이었지요. 그렇지만 본인의 고민이나 힘든 상황을 제게 이야기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저 늘 아빠처럼 든든하고 다정한 좋은 연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녀석에게 저는 그리 좋은 인연은 되어주지 못한 것 같군요. 어쩌면 최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안해. 우리 처음 맞는 100일이라 꼭 옆에 있어주고 싶은데.. 아르바이트 담당하시는 분께 부탁을 드려봤는데 아무래도 시기적으로 힘들 것 같아. 어쩌지? 정말 같이하고 싶었는데.. 미안해 정말.."


녀석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녀석과의 100일 되던 날 아침, 급작스런 무선호출이 왔습니다.


"창밖 로비 쪽 좀 내려다봐봐. 혹시 저 사람 네 남자 친구 아냐?"


"응? 왜?!"


당시 리조트에서 안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나는, 창밖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랐지요. 그곳에 녀석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꽃다발을 든 채로 예전 그 날처럼 제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지요. 조금은 쑥스럽지만 환한 웃음과 함께.




생각이 이리저리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서 순차적으로 행선지를 달리하지 않고, 아주 먼 과거에서 최근의 과거로 다시 그 이전의 과거로 여러 기억들이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그러다 이번엔 잠시 여행을 멈추고 현실을 마주합니다. 널브러진 거실의 인형과 장난감들. 그리고 쌓여있는 주방의 일거리들. 시간은 점차적으로 식사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왜 엄마가 됐어?"

"아빠는 어릴 적에 자전거 타다가 발을 다쳤댔는데.. 근데 그때 아빠 울었어 엄마?"

"엄마. 아빠 진짜 고등학생 때는 날씬했던 거 맞아? 근데 아빠 그때도 잘생겼었어?"


얼굴을 마주한 식탁에서 아이들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마구 쏟아내곤 합니다.


'사실 엄마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약속하고 아빠랑 결혼했어. 그런데 속았단다. 그 증거가 너희들이야.'

'너희 아빠 어린 시절은 내가 알 수가 없단다. 우린 서른 살도 넘어서 만났거든.'

'너희 아빠가 객관적으로 잘 생겼다고 하기엔. 글쎄다.'


라는 답변을 아이들에게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늘 적당한 선에서 답을 찾느라 내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곤 합니다.


"아마 사랑스러운 너희들을 만나려고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을까?"

"고등학생 때는 엄마와 만나기 전이니까 할머니께 여쭤볼까? 아마 지금보다 훨씬 멋지지 않았을까? ;;;"





"나 너 좋아해. 오래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너만 좋아했어."


"나도 너 좋아해. 그렇지만, 친구로서. 나는 네가 남자로는 느껴지지가 않아. 미안해. 난 우리가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는 편한 친구였으면 좋겠어. 그게 싫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연을 끊어야겠지."


그랬던 그와 내가 같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곳엔 그와 내가 조몰락 대며 빚어놓은 서로의 모습을 공평하게 반반씩 닮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늘 초롱초롱 반짝이는 네 개의 눈동자로 늘 나를 바라보고 있지요. 지금도 노트북 건너편에 앉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제게 묻습니다.


"그런데 엄마.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이제 곧 녀석이 제게로 다가올 것 같군요. 이만 노트북을 접어야겠습니다. 흩어져 나부끼는 잡생각들을 주워 담아 다시금 제대로 된 현실을 만들어가야 하니까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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